방학이나 특별한 가족행사가 있는 날이면 전국 각지(?)에서 모여 콩 볶듯 후다닥 일을 해치우고 각자 자신의 거처를 찾아가는 우리들이 이제 더 이상 별난 가족의 모습은 아닌 것 같다. 서울, 광주, 경남 등 서너 곳에 흩어져 사는 우리 가족들의 통신비와 주거비, 교통비를 비롯한 일상생활비를 계산해보면 우리 부모세대는 혀를 끌끌 찬다.
우리 부부는 부모를 돌보기도 힘들었을 뿐더러 원하는 만큼 자식을 생산한 것도 아니다. 자식을 적게 낳은 필자는 가족계획운동이 한창이던 60년대, 70년대였다면 계몽된 부부요 애국자였겠지만 세계에서 출산율이 가장 낮은 나라가 된 2000년대에 들어서는 이기적인 부모이자 국민의 기본의무도 못하는 사람이 된 셈이다.
우리 가족 디아스포라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까닭에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가 아프거나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 처할 때가 가장 안타깝다. 부모님이 노환으로 입원을 해야 하거나 아직 학업 중인 아이가 심하게 아플 때면 대책이 없다. 간병인을 쓸 만큼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부부 중 한 사람이 일자리를 버리고 거처를 합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가족의 건강성을 유지하는 데는 경제적인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가족 구성원 각자의 성장을 위해 경제적 비효율성을 감내하더라도 사회적 삶의 피로에서 오는 긴장을 관리해주는 정서적 기능을 가족이 얼마나 잘 해 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나아가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노인이나 성장기의 자녀, 장애가 있는 가족 구성원들을 일상적으로 돌보아 주는 일이다. 한 달에 몇 번 정도 얼굴을 보는 부부가 사랑과 신뢰를 유지하는 일, 또 일상적으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자식이나 노부모가 버려진 채 가족연대를 유지하는 일은 웬만한 정신력을 갖지 않으면 어렵다.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성장기에 꿈꾸어온 가족의 이상을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의 가족은 형태와 기능면에서뿐만 아니라 그 내부의 가족관계까지 통째로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혼한 부부와 그들에게서 출생한 자녀로 구성되는 일상 생활공동체로서의 가족, 이른바, 정상가족에 대한 집착은 이제 이상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결혼가치관의 변화로 동거가족이나 싱글가족이 늘어나고 있고 다양한 사유로 한 부모 가족도 급증하는 추세다.
노부모 부양관도 바뀌어 노인 단독가구가 꾸준히 늘고 있다. 사회적으로는 평균수명의 연장으로 노인부양과 같은 보살핌 노동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반면에 여성들의 취업이 보편화되고 가족구조가 변화하면서 보살핌 노동의 공급은 한계에 직면해 있다.
변화하는 현실의 가족이 필요로 하는 욕구를 충족해주는 것이 국가의 가족정책이다. 가족정책은 한 단위로서 가족 구성원들의 복지를 향상시켜 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가족의 보살핌 역할을 도맡아온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하게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성 평등을 실현하는데 있어서도 효과적이다.
이상적인 정상가족의 신화에 매달리지 않고 현실 속의 다양한 가족이 필요로 하는 보살핌 노동을 사회화하여 국가가 맡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작년 가을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에서 의결된 가족정책기본법안의 핵심취지이다. 이 법안은 변화하는 가족의 현실에 대한 진지한 성찰없이 조급하게 제정된 2004년의 건강가정기본법의 근본적인 개정안이라고 할 수 있다. 모쪼록 이번 6월 임시국회에서는 이 법안이 반드시 통과되기를 바란다.
현명한 가족정책은 ‘정상가족’이라는 고정관념에 묶이지 않고, 현실의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가족들이 필요로 하는 보살핌 노동을 국가가 사회서비스로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 개개인이 보살핌의 역할은 가족 고유의 일이라거나, 가족 안에서 보살핌 전담자는 여성이라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 보살핌의 사회적 성격을 공론화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가족정책을 수립하는 것이 서민가정이 가족의 건강성을 유지하는 필요조건이라 할 수 있다.
안진〈광신대 사회복지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