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무역협회가 발행한 ‘208개국 경제·무역·사회지표로 본 대한민국 2006’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세계 223개국 중 국토면적(108위)과 인구(27위) 규모에선 보통국가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경제규모(11위)와 교역규모(12위)는 세계적 수준에 이르고 있다. 선박 제조와 D램 반도체, TFT-LCD 제조가 세계 1위를 계속 유지하고 있고, 철강생산·화학섬유·자동차 생산량과 산업용 로봇 보유대수는 세계 5위권에 올라 있다.
IT(정보통신)강국의 위상도 여전하다. 주가 총액은 얼마 전 1조달러를 돌파했다. 거시지표를 보면 한국경제가 탄탄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국가경제와 관련한 이러한 수치가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려면 국민들의 구체적인 삶의 질 역시 그에 상응하게 높아져야 한다.
구체적 민생을 들여다보면 회의적 입장을 가질 수밖에 없다. 제조업 생산직 노동자가 받는 총 급여는 조사 대상 58개국 중 27위이고, 서울의 도시 생계비는 142개 세계 주요 도시 중 2번째로 높다. 10위권이라는 경제규모와 달리 1인당 국민소득은 208개국 중 47위, 삶의 질은 67개국 중 39위에 머물러 있다.
주택보급율은 지난 2002년에 이미 100%를 넘었으나 국민의 절반 가량이 자기 집을 갖지 못하고 있다. 사교육비 부담 역시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또 2000년에 비해 2005년에 초혼 연령이 남녀 모두 1년 이상 늦어졌고, 합계출산율은 1.47명에서 1.08명으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한국은 OECD 가입국 가운데 소득불평등 정도가 최상위에 속하고, 중산층이 줄어들면서 부유층과 빈곤층이 확대되는 ‘양극화 현상’도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양극화는 외환위기 이후 특히 심해지고 있다. 기업경쟁력 강화가 강조되면서 직장을 잃거나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내몰린 노동자들도 급증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절대빈곤층으로 전락했다. 경제의 외형은 커지고 있으나, 경제성장이 소득분배로 제대로 이어지지 못한 결과 삶의 질이 그에 비례하여 높아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광주에서 한나라당 대선주자들의 경제정책 토론회가 열렸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주장하는 한반도대운하의 경제성 여부와 반환경성, 국민건강 침해 가능성 등 가장 큰 이슈였다. 7% 성장률, 10년 내 국민소득 4만달러, 세계 7대 강국을 의미하는 ‘747 공약’, 세금과 정부를 줄이고 규제는 풀되 국가기강을 세운다는 ‘줄푸세 공약’이 다음 이슈였다.
오늘의 민생위기를 초래한 이념적 가치인 개발 우선주의, 성장 지상주의, 시장 만능주의 만이 강조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성장이 이루어지면 서민들의 삶도 자동적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근거 없는 논리 만이 앞서고 있는 것이다.
최근 어느 재벌은 폭행을 당한 아들을 위해 폭력배 등을 동원, 보복 폭행에 나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우리 사회의 기득권 세력들이 여전히 특권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또 다른 재벌 2세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주식을 취득하고 순환출자제도의 맹점을 이용하여 기업경영권을 승계한 사실이 드러났다. 불공정하게 시장지배력을 키워온 재벌 성장의 역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시장의 자유’니 ‘경제개방’이니 하는 추상적 원칙과 화려한 언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공정한 시장질서’와 ‘국익과 민생을 지키는 개방’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구체적 현실을 따져보는 실사구시적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올해는 6월 민주화운동 20주년이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정치적 민주화와 절차적 기본권은 확대됐지만, 사회경제적 민주화나 민생은 오히려 퇴보했다. 우리가 민주주의에 대해 잘 몰랐던 듯 같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실현된 이후에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기 위한 후속과제가 뒤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성장과 분배, 사회적 통합이 똑같이 중요시되는 사회, 자유만큼이나 평등이 지니는 가치를 인정하고 이를 실현할 방안을 모색하는 사회, 다수의 이익을 존중하되 소수의 희생을 동시에 포용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2단계 민주주의’ 활동을 다시 시작해야 할 때다.


이상갑〈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