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전국구 국회의원이 의원직을 사퇴하고 대학으로 간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런 결정에는 짐작대로 정치(판)에 대한 실망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동시에 ‘그럼에도 경제보다도 정치가 더 힘이 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는 요지의 말을 남긴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 국회의원이 어떤 이유로 정치를 떠났는 지는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정치가 너무나도 중요한 것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 국민들이 마치 신이나 들린 것처럼 ‘경제, 경제’ 하는 데 경제보다 정치의 힘이 더 세다는 것이다.

정치를 사회와 문화 등과 비교하면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정치의 힘이 세다는 것은 매우 상식적이다. 왜냐하면, 정치란 그 공동체의 경제, 사회, 문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토론하고 합의하며 실행해 내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정치를 욕하고 피하는 것으로 자기는 고결한 곳에서 노는 것처럼 행세하거나 착각하고 산다. 모든 것을 정치에 핑계대고 자기는 심리적으로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원인은 정치권력이 국민의 뜻과 상관없이 장악되고 유지되었던 세월을 오래 겪었던 탓일 것이다. 이런 독재시대에 앞장서 맞선 사람들이 있었고 여기에 국민의 뜻이 모아지고 힘이 실리면서 우리는 민주사회를 실현할 수 있었다.

불과 10여년의 세월이지만 대한민국은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을 수준의 민주국가로 변모했다. 기득권에 연연하여 불평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른바 리더가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데에 익숙해진 나머지 주인 노릇 하라는 것을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의 빠른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어떻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과거의 독재체제로 회귀할 수도 없고 회귀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명제이다. 그러자면 정치가 더 이상 더럽거나 부끄러운 것이어서는 안 된다. 선거가 더 이상 정치를 하고 싶다고 나선 후보자 가운데 누구에겐가 유권자가 선심을 베풀어 한 표 던져주는 것일 수는 없다.

진정으로 우리 공동체를 위해 쓸모가 있다고 생각되는 후보자가 나와 준 것을 감사하고, 그런 후보가 없으면 그 중 나은 후보를 찾아 맡기는 노력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에서 정치의 주인은 국민이며, 국민이 정치에 책임을 지는 길은 선거를 통해서 정치를 맡을 사람들을 잘 뽑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투표를 올바로 하는 일과 이에 못지않게 좋은 후보들이 정치시장(政治市場)에 많이 나올 수 있도록 제도를 다듬는 일이 중요하다. 돈 정치의 차단 등 선거제도의 개선에는 많은 진전이 있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우리 정치의 선진화를 가로막는 지역당에 의한 지역정치의 틀은 깨지 못했다. 또한, 여성의 정치 진출이 다소 늘긴 했지만 여전히 심한 남성 주도의 정치를 면치 못하고 있다.

부끄럽고 답답한 일이다. 그 개선방안으로 중·대선거구제가 제안된 지 오래지만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개선방안이 논의될 때마다 근본적으로 당리당략을 바탕에 깐 견강부회와 아전인수의 억지 변명이 난무해 왔다.
이젠 국민이 나서야 한다. 우리 여성들이 먼저 정치의 중요성과 잘못된 제도의 심각성을 깊이 인식하고 정치의 개선에 앞장서야 할 때이다. 여성이 나서면 그동안 떳떳하지 못한 지역구도에 의지해서 궁벽한 싸움으로 정치를 더럽혀온 남성주도의 딱딱한 정치를 유연하고 당당한 선진정치로 바꿀 수 있다.

올 연말에는 대선을 치르고, 내년 봄이면 총선이 있다.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한국여성단체협의회는 올해 ‘여성이 선거문화를 바꾼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여성의 정치참여 확대를 위한 제도개선운동에 적극 나서기로 했다. 대선거구제와 함께 국회의원 정수의 50% 비례대표 및 50% 여성 할당을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전개될 것이다.

각계각층의 여성들이 나서서 꾸준히 힘을 모으다 보면 가랑비에 옷 젖듯이 남성들이 못해낸 큰 일을 해낼 것이다. 이는 결코 여성만을 위한 일이 아니다. 선진 한국으로 가기 위해서 하루라도 빨리 실현해야 할 과업이므로, 남성들도 적극 동참해 주었으면 좋겠다.

김화중〈전 보건복지부 장관·한국여성단체협의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