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뉴 라이트진영이 현재의 역사 교과서가 잘못되었다고 강변하면서 그들 나름대로 새로운 역사 교과서의 시안을 내놓았다. 이 시안이 만들어 낸 역사 교과서 파동을 통해 제기되었던 문제 중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관계된 ‘근대화 논쟁’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주제였다.
그러나 이 논쟁 속에는 함정 하나가 도사리고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가 세계적으로 제국주의의 시대이었다는 전제 하에 약자에 대한 강자의 강제적 지배를 전혀 문제 삼지 않은 것도 그렇지만, 일본이 한국에서 추진했던 근대화 정책의 의도까지도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마땅히 제기될 수 있는 도덕적 문제까지 일본에게 면죄부를 주고 만 것이다. 인도의 경우도 ‘영국화’를 거쳐 일정한 정도 근대화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식민지 시절을 경험했던 과거 신생국가들은 독립 직후 거의 모두가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다. 그것은 식민 지배자가 본국 위주의 경제 정책을 추진하면서 식민지의 경제를 본국에 종속되는 체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신생국가들은 애초부터 자생력을 가질 수 없었다.
뉴 라이트 측은 심지어 영국과 일본의 지배가 같은 종류이고 성격이었기 때문에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강변했다. 두 지배는 분명 같은 유(類)에 속할 수는 있겠지만 두 나라의 상이한 역사적 환경과 경험이 전혀 다른 지배 방식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일본의 지배를 통해 우리나라도 근대화가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다만 그 근대화 과정의 의도와 성격의 차이 그리고 문화의 차이가 식민지배를 받았던 나라의 이후 역사에 크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영향을 받은 우리는 강력한 군부 독재를 경험해야 했다.
인도 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간디를 보면 떠오르는 모습이 있다. 첫째, 물산장려운동을 상징했던 물레를 돌리는 간디의 모습이다. 둘째, 영국식 교육을 받은 인도인으로서는 1세대에 해당하는 인물이 오히려 인도의 독립운동에 헌신했었다는 사실이다. 비슷한 제국주의였겠지만 영국과 일본은 과거 역사와 문화가 전혀 달랐기에 이런 다른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렇지만 식민 모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의 논리에 저항하면서 토착 민족자본을 육성하자는 구호로 활용되는 물레 돌리는 모습은 아무래도 전근대적이고 시대착오적인 모습의 상징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미 유럽이 산업혁명을 거쳐 기계를 이용하는 대규모의 공장에서 상품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있던 시기에 수공업적인 생산 방식에 집착하고 있다고 오해를 살 수 있는 그런 모습은 독립 의지에의 상징적 가치 외에는 다른 무엇도 인정받기 어렵다.
과거에는 ‘영국화’가 근대화와 동의어처럼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미국화’가 근대화와 동의어처럼 흔히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혼동은 과거 근대화를 추구했던 ‘후발국가’들이 영국화 혹은 미국화를 자신들의 목표로 내걸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정치적 구호가 의미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기술 등의 일정한 분야에서는 그것이 근대화를 의미할 수 있겠지만,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학자들은 근대화가 ‘삶의 합리화’를 의미할 뿐이라고 사전적으로 정의한다.
이 사전적 논쟁과 관련된 한 사례를 들어 보자. 대형 유통업체가 들어오면 이웃의 재래시장이나 소형 마트들이 곧바로 생존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이 변화에는 판단을 어렵게 하는 몇 가지 요소들이 있다. 적지 않은 영세 상인들의 생계 문제가 걸려있기도 하지만 역으로 소비자들의 입장은 대형 유통업체가 들어오는 것이 더 유익하다.
변화 자체가 불가피하다는 자본의 논리를 차치하고라도 위의 두 입장은 조화를 찾기가 쉽지 않다. 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직전인 16∼17세기의 영국사는 영세한 수공업자들이 조합의 형태나 연대방식 등을 통해 주문과 판매 등 유통과정을 공동 관리하고 생산을 나누어 분담하는 방식을 추구하면서 변화에 대응했던 사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한국 정부도 무조건 시장개방과 교육개방을 외치기 전에 우리 사회 내부에서 계층 간의 유동성을 가능하게 하는 개방 여건을 먼저 마련해 주어야 한다.

전지용<조선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