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어부, 배고픈 다리, 어부의 무덤에서] 한쪽은 빨래터, 한쪽은 어장…배고픈 다리에서 배부른 다리로
2022년 05월 24일(화) 23:15
518 사적지 운림동 ‘배고픈 다리’
광주천서 민물고기 잡는 ‘도시어부’
바티칸국 성베드로 대성당
예수 제자이자 어부 베드로 무덤터
역사 잊으면 불우한 역사 반복
‘먹고사니즘’ 넘어 정의 꿈꿔야

광주하면 물의 땅 내륙이어서 어부란 직종이 낯설겠지만 민물고기들을 잡으러 다니는 어부들이 많이 살았었다. 지금은 40개의 다리가 놓인 광주천은 어른들이 투망을 던져 고기를 잡던 곳이었다. /김진수 기자 jeans@

무등묏길 오르는 운림동 ‘배고픈 다리(현 홍림교)’. 오일팔 사적지 13호다. 퇴각했던 계엄군이 화순 너릿재를 통해 역습할까봐 시민군들이 뭉쳐 촘촘하게 지켜낸 길목이렷다.

‘배고픈’이라는 이름의 다리가 생뚱해서 캐묻는 외지인도 있으리라. 등짐 나무꾼들이 무등산에 오르기 전 이른 새벽 냇물로 고픈 배를 채웠다는 설이 그 하나. 그리고 광주 원님을 처형하라는 임금의 명령을 받고 내려온 군마들이 다리 위에 꼼짝 않고 멈춰서 식음전폐. 임금의 꿈에 스님들이 나타나 광주 원님은 절대 죽여선 안된다고 하소연. 임금이 결국 철회 명령을 내리자 그제야 말들이 여물을 먹고 움직이더라는 설이 두울. 그밖에도 전설은 여럿이다.

광주까지를 관장하던 나주목 목사로 제수된 인물 중엔 ‘홍길동’의 저자 허균도 있었다. 그를 이단시하는 풍토가 만연한 조정에서 ‘기생들과 시서화 놀이’를 좋아한다는 투서가 들어와 결국 낙마했다고 한다. “나주는 그야말로 호남의 웅진이어서 원님 되길 내심 소원하였다. 헌데 원수놈이 모함하고 탄핵할 줄 뉘라서 알았으리오. 추운 산을 홀로 바라보며 한번 크게 웃어볼 뿐이노라” 이런 시를 남겼단다. 허균은 나주 목사를 끝으로 정계 은퇴를 하려던 심경도 내비쳤는데, 변혁과 저항의 땅 ‘전라도’에 머물고픈 염원이 매우 컸던 것 같다.

내가 강진에서 목회할 때 광주권 거처를 운림동에 두고 지냈었다. 증심사 일철 스님과 벗하며 자주 다담을 나누고, 의기투합해 ‘무등산 풍경소리 음악회’를 처음 열어 시민들과 만났었다. 배고픈 다리를 건너 학동에서 전대 병원까지 걸으면 금세 배가 고파졌다. 남광주시장 국밥집 골목과 바지락 칼국수는 어머니의 밥상이나 같았다.

지금은 성인이 된 내 아이는 서울에서 살다내려와 학강초등학교 유치원을 다녔었다. 학강 다리를 건너면서 바라본 광주천은 볕 좋은 날 푸르딩딩 색깔이 환했다가 가끔 내 마음이 어지러울 땐 핏물로 변하기도 했다. 오월 어느 날 이곳에 붉은 핏물이 콸콸 뿌려지고, 누이와 형이 숨져 핏물과 함께 떠내려갔다. 내 나라 군인들에게 총 맞아 죽지 않은 아빠와 아이는 손을 꼭 쥐고서 학강 다리를 ‘떨며 노여워하며’ 건너다니곤 했다.

오일팔 사적지 13호인 배고픈 다리


광주하면 뭍의 땅 내륙이어서 어부란 직종이 낯설겠지만, 민물고기들을 잡으러 다니는 어부들이 숱하게 많이 살았다. 전문 어부가 아니더라도 닭장을 만들던 철망의 철사를 뜯어다가 시멘트 바닥에 납작하게 갈고선 이를 실에 연결, 대나무에 묶으면 뚝딱 낚싯대가 되었다. 발목이 굵은 아이들은 찢어진 모기장을 이용하여 쪽대를 만들고 광주천에 뛰어들었다. 한쪽은 빨래터, 한쪽은 어장. 어른들은 투망을 짊어지고 돌아 댕기다가 깊은 물에 좌악 펼치면 하다못해 오색금붕어 피라미 새끼라도 딸려들 올라왔다.

도시 어부들은 흔한 이웃집 아무개들이고, 잘 익은 무청에 붕어찜 한 그릇 먹고 나면 배고픈 다리에서 배부른 다리로, 무등무등 춤추며 외등 아래로들 귀가했다. 도시 어부가 사는 도심 곁엔 또 물 가득한 호수, ‘경양 방죽’이란 곳이 있었다. 계림동 전역이 수초와 빗물이 모아진 방죽이었단다. 정약용의 ‘목민 심서’에도 나올 만큼 유명짜한 저수지였다니 지금와선 믿어지지 않는다. 과거엔 치산치수가 백성의 목숨줄에 닿아 있었기에, 방죽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농경사회 유지의 관건이었다. 큰비라도 내리면 둑이 터질까봐 책임자들이 가슴을 졸였다.

무등산 장불재의 샘골에서 흘러나온 지천인 증심사천. 의병장 고경명 장군은 무등산 샘골 물로 미싯가루를 타먹고는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물이란 게 위에선 신선하고 좋았겠지만 마을을 거치면서 똥물이 되고 탁류로 변한다. 그러다가 모래사장을 만나면 금모래 은모래에 씻겨 물빛이 살아나기도 하고 그러는 법. 물은 도심을 가로지르다 동계천과 만난다. 광천동에서는 서방천이 또 이 앞을 따라오다가 극락강에서 만나 영산강과 한 몸을 이룬다. 광주천은 양동에 이르러 맑고 푸러지는데 과거 이곳은 물거름망 갈대밭이었다. 일제 강점기엔 양동 갈대밭 입구 모래사장에 장터가 열렸다.

도시 어부의 천막집


시방 광주천에는 40개의 다리가 서있다. 그러나 먼 예전엔 징검다리가 고작이었다. 장대비 뒷끝엔 물살이 거칠어서 이를 방어하는 방풍림을 조성했는데, 담양의 관방제림과 같은 치수 용도였다. 방림동은 그래서 지은 대표 이름이다. 양림동을 비롯 홍림, 유림 등의 마을 이름도 모두 나무를 심어 만든 뚝방이름이다. 물이 빠지고 모래내 백사장이 있는 곳에 보통 장이 들어섰다. 어부들이 근교에서 잡은 물고기들을 내다놓고 팔기도 했다. 어부들이 죽으면 양림동 뒷산 공동묘지나 멀리는 망월 무덤산까지 주검을 져날랐다. 상여꽃은 바람에 날려 탱자나무 가시에 걸리거나 초가집 박넝쿨에 앉아 오래오래 울었다.

인류의 가장 신성한 장소 가운데 하나가 바로 어부의 무덤이다. 어디인고 하면 바티칸국 성베드로 대성당. 예수의 제자이자 어부 베드로의 무덤터다. 성당지하 공동묘지를 1939년 발굴하면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지하묘지에서 화병과 장미, 그리고 새를 그린 벽화가 발굴되었는데 이는 로마의 위세가 정점에 있던 1-2세기 장례용 벽화였다. 황금 브로치를 찬 집정관 딸의 유해도 발견되어 고고학계가 뒤집어졌다. 게다가 초기기독교 상징인 물고기 익투스, 암호문, 목자상, 십자가 등이 새겨진 벽화는 순교자들의 성지임을 드러냈다. 초기 기독교인들을 박해할 때, 그들을 밀고하는 자에겐 재산의 일부를 떼어 선물하기까지 했다. 그러니 밀고와 신고, 학살은 광범위하고 참람하게 이뤄졌다.

어부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바티칸


로마에 간 예수의 제자 베드로는 AD 66년경 네로 황제에 의해 처형되었고 바티칸 언덕에 버려졌다. 250년 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베드로를 추모하기 위해 이곳에 대성당을 건축했다. 기독교도들이 고문과 처형을 당한 장소는 네로가 거대한 황궁을 꿈꾸며 도무스 아우레아(Domus Aurea) 황금 궁전을 세운 곳이었다. 남녀 기독교도들을 체포하면 기름에 푹 담갔다가 불이 잘 붙는 천에 싸고 장대에 매달아 오랫동안 도시를 밝히는 횃불로 사용했다. 여자와 아이를 동물 가죽 속에 넣어 짐승이 물어뜯어 죽게 만들었고, 십자가 처형은 거의 매일 일상이었다. 심지어 거꾸로 십자가에 죽이기도 했는데, 어부 베드로도 그렇게 뒤집힌 채 죽었다고 한다.

시체 소각장인 인적 드문 공터에 버린 베드로 시신을 신자들이 수습하고 염했다. 그 장소는 비밀 모임 장소로 쓰였고, 오늘의 바티칸이 되었다. 한 어부의 무덤은 인류에게 새날의 꿈을 꾸게 만들었다. 광주에 살았던 도시 어부들도 마찬가지다. 그들 가운데는 인간해방, 민중해방을 부르짖으며 갑오농민전쟁에 투신했다. 외세의 간섭과 국권을 잃을 때는 조국을 해방하는 독립 일꾼으로 맨앞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러다가 군인들의 쿠데타에 저항하며 민주화 쟁취를 위해 거리로 뛰쳐나왔다가 고귀한 목숨을 잃었다. 이 땅의 어부들 무덤 또한 베드로의 저 바티칸 성지나 다를 바 없이 성스럽다.

영국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는 ‘오필리아’라는 명작을 남긴다. 오월광주를 담은 영화 ‘꽃잎’의 소녀처럼 정신줄을 놓아버린 오필리아는 날마다 노래를 부르며 화관을 만들었다. 화관을 꾸밀 꽃을 따기 위해 몸을 엎드리다가 그만 개울에 빠져 죽고 만다. 그림속 오필리아의 머리 위엔 수양버들이 한들거린다. 쐐기풀은 고통을, 양귀비꽃은 잠과 죽음을, 복수초는 슬픔을, 데이지와 제비꽃은 순결을, 팬지는 허무한 사랑을 의미한다. 눈을 뜬 채 죽어 물에 둥둥 뜬 오필리아. 하얀 이를 드러내며 무언가 마지막 못다한 말을 중얼거리는 표정이다.

꽃비 내리는 어느 봄날 죽어간 사람들아. 한 줌 겨울빛에 들떠 꽃을 피운 봄꽃아. 무엇보다 두런두런 이야기꽃이 아름다웠을 광주 공동체. 천상을 찢은 예수의 죽음과 같이 역사에 둥둥 뜬 그런 안타까운 주검들이 흘러갔을 저 광주천과 영산강.

에버렛 밀레이 작 ‘오필리아’


마가목, 솔송나무, 떡갈 밤나무, 자크르르한 ‘부들’이 춤추는 축축한 강변에서 버드나무가 우쑥 자란다. 어둠을 좋아하는 민물장어는 수초 속에 숨어 헤엄치고, 잉어는 해초를 비집고서 몸을 낮춘다. 물떼새들이 낚시꾼의 또아리를 멀찌감치 두고 웅크리고들 있다. 모래톱에 몸을 데우는 물오리떼들은 수런수런 떠나온 별의 이야기를 하면서 갓부화한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친다.

인간 또한 인간들의 역사를 만들고, 그 역사는 배움을 통해 이어달리기를 한다. 역사를 배우려 않고 역사를 잊은 자들에겐 불우한 역사가 반복된다. 그런 겨레는 후손들이 배나 불행해진다. 어부들이 널어놓은 투망이 햇볕에 바짝 마르면 농사를 망쳤대도 굶어죽을 일은 없으리라. 거기다 ‘먹고사니즘’만을 위해 살지 않은 정의로운 어부들의 집에는 헤진 태극기와 피묻은 자매형제의 옷가지들이 유품함에 고이 담겨 새날을 기다리곤 하였다. 어부의 선한 죽음을 하늘이여 헛되이 외면하지 마소서.

임의진

시인. 화가. 사진도 찍는다. ‘참꽃 피는 마을’, ‘버드나무와 별과 구름의 마을’, ‘여행자의 노래 1-10’, ‘심야버스’ 등의 수필집, 시집, 음반 등을 펴냈으며 EBS 세계테마기행, 세계견문록 아틀라스 등에 종종 출연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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