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엄한 역사와 다양한 스토리 깃든 ‘세계를 담은 정물화’
2020년 05월 08일(금) 00:00
박성천 기자가 추천하는 책
책거리
정병모 지음

프랑스 기메동양박물관 소장 ‘책거리’

프랑스 기메동양박물관 소장 ‘책거리와 기린’
“책거리는 더 이상 고상한 문인 취향의 상징물이 아니요, 서학을 막기 위한 군주의 방편도 아니다. 생활의 표현이자 행복을 염원하는 욕망의 공간이다. 문방에서 시작한 책거리는 원래 책과 물건을 담는 현실 공간이었지만, 점차 현실에서 벗어나 꿈과 이상을 펼치는 상상의 공간으로 변해갔다. 본래의 완상적 혹은 정치적 목적과 달리 장식적이고 길상적인 경향으로 나아간 책거리는, 행복을 상징하는 자연물로 책과 물건을 장식하기 시작했다.”(본문 중에서)



정물화하면 대개 세잔이나 고흐 같은 서양화가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도 정물화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서양의 정물화처럼 물건과 꽃이 소재가 아닌 책으로 특화된 그림이 있었다. 바로 조선 후기 유행했던 정물화 ‘책거리’가 그것이다.

어떤 이들은 책거리 하면 서당의 풍속을 떠올린다. 한 권의 책을 배우고 훈장과 동학들에게 떡과 음식을 대접하는 일 말이다. 그러나 언급한 대로 조선 후기의 정물화인 책거리는 책이 중심 소재다.

한국 책거리의 모든 것을 다룬 책이 출간됐다. ‘차이나는 클라스’의 스타강사이자 ‘민화는 민화다’의 저자인 정병모 경주대 초빙교수가 펴낸 ‘책거리’가 바로 그것. 정 교수는 지금까지 민화의 대중화와 세계화에 힘썼으며 관련 서적을 꾸준히 펴냈다.

저자에 따르면 책거리는 단순히 조선시대 문화유산만이 아닌 세계적인 한국 문화유산이다. 세계 각국의 정물화 중 ‘책’이라는 키워드가 명칭에 언급된 것은 유일하다는 것이다.

책거리는 책뿐만 아니라 이와 연계된 사물이 포함된다. 책을 비롯해 “도자기, 청동기, 꽃, 과일, 기물, 옷 등이 등장한다. 책거리를 영어로 번역하면 ‘Books and Things’가 된다. ‘Scholars’ Accoutrements’란 영문 이름도 사용하는데, 이는 책이나 물건보다는 문인들의 우아한 상징물인 문방구를 그린 ‘문방도’를 가리킨다.”

조선에서는 네덜란드 정물화보다 한 세기 늦은 18세기 후반 정물화가 성행했다. 이때부터 시작해 20세기 전반까지 왕부터 일반 서민에 걸쳐 책거리를 폭넓게 향유했다. 예술세계 또한 독특하고 다양할 만큼 인상적인 작품들이 다수 배출됐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책거리의 소재가 다양해진다. 이 시기는 한국회화사에서 전환의 시기라 할 만큼 서민의 생활을 다룬 풍속화가 등장했다. 또한 진경산수화도 주목을 받아 자연의 아름다움이 조명을 받았다.

이때부터 책거리 소재는 두루마리, 향로, 안경, 회중시계, 거울, 자, 반짇고리, 거문고 등 이전보다 훨씬 다채로워진다. 당시 유행한 물질문화가 책거리 화폭 속에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다. 또한 청나라에서 수입한 화려한 도자기들과 자명종을 비롯한 서양의 물건도 있다.

그렇다면 왜 책거리가 특별한 존재로 인식됐을까. 조선은 문치국가였으며 책은 선비들이 추구한 정신문화의 정화(精華)였다. 세상을 배우고 받아들이며 다스리는 방편이 책이었다. 책 외의 물건에 대한 선비들의 생각은 물건에 빠지면 고상한 뜻을 잃는다는 ‘완물상지’(玩物喪志)라는 말로 통용됐다.

이처럼 조선후기에는 책이라는 고고한 소재와 통속적인 물건이 함께 표현됐다. 시대의 양면성을 드러낸 상징적인 풍경이다. 저자는 “겉으로 보면 정신문화와 물질문화가 조화로워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물질문화가 정신문화에 기대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설명한다. 한마디로 ‘이념의 시대’에서 ‘물건의 시대’로 옮겨가는 변화의 신호탄인 셈이다.

책거리는 전하는 작품 수로나 예술적 관점으로나 조선후기 회화를 대표할 만하다. 일상적인 물건을 그린 것이 아니라 “장엄한 역사가 펼쳐져 있고 다채로운 스토리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대항해 시대와 조선후기의 역사가 투영된 ‘세계를 담은 정물화’이다.

<다할미디어·2만원>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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