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와 나치 시대 네 여성 예술가들의 뒤틀린 삶
2020년 03월 06일(금) 00:00
제국의 아이돌
이혜진 지음
그가 탄 전용기가 뉘른베르크에 착륙하자 사람들은 환호한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그를 보기 위해 거리에 늘어선 군중들은 손수건을 흔들고 꽃다발을 건네며 외치기 시작한다. ‘하일 히틀러(히틀러 만세)’라고.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시작되는 ‘의지의 승리’는 1934년 9월 5일부터 14일까지 히틀러의 순찰과 나치당의 전당대회를 기록한 다큐멘터리로 선정영화의 정석으로 꼽힌다.

이 영화의 감독은 ‘예술가의 입장’에서 촬영해달라는 히틀러의 부탁을 받은 레니 리펜슈탈 감독이다. 36대의 카메라와 120명의 촬영 스테프가 참여한 이 영화를 통해 혁신적인 촬영 기법을 선보인 그녀는 ‘나치의 프로파간다’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불세출의 천재’로 경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전범재판에서 무죄로 풀려난 이후 아프리카 원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사진작가로서 제2의 인생을 개척한 그녀는 101세로 사망할 때까지 나치 혐의를 부인했다.

이혜진 세명대 교양학부 교수가 펴낸 ‘제국의 아이돌-제국의 시대를 살아간 네 명의 여성 예술가’는 20세기, 일본과 독일의 제국주의를 경험한 예술가들이 국가주의와 개인의 아이덴티티, 프로파간다와 예술적 성취 사이에서 어떻게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갔는지, 그것이 성공했는지 혹은 결국 실패했는지 추적한 책이다.

저자가 주목한 또 다른 인물은 무용가 최승희다. 16세의 나이에 일본 신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문하에 들어간 후 제국 일본의 무희로 명성을 떨친 최승희는 ‘대동아공영’을 위한 일제 프로파간다에 복무했다는 이유로 전후 친일 혐의를 받고 월북했다. 북한 예술인 최고의 영예인 ‘인민배우’의 반열에 오른 그는 남편 안막의 숙청과 함께 몰락한 후 잊혀졌다 1990년대 복권된 후 2000년대 들어 한국 신무용의 선구자로 남북한 모두에서 주목받았다.

독일 출신 여배우로 당대의 섹시 심벌이었으나 히틀러의 제 3제국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후 연합군을 위한 위문 무대에 오른 마를레네 디트리히. ‘미군들의 영원한 연인’으로 불리며 연합군 측의 프로파간다에 적극 협조한 탓에 독일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혔던 그녀는 나치 몰락 후에도 그 이미지를 벗지 못했고, 사후 10년이 흐른 뒤에야 독일 명예시민으로 추서됐다.

그밖에 중국에서 태어난 일본인 소녀 야마구치 요시코를 만난다. 만주국 이데올로기인 ‘오족협화’의 상징이 돼 중국인 리샹란으로 활동하며 영화배우이자 가수로 대성공을 거두지만 일본 패망 후 중국인 친일파로 몰려 처형당할 위기를 가까스로 벗어난 그녀는 야마구치 요시코로 회귀, 일본에 돌아와 3선 참의원을 지내며 국제 평화주의를 위해 힘썼다.

저자는 “네 명의 뒤틀린 삶을 되돌아볼 때 우리는 국가 이데올로기와 대중문화 권력 속에 놓인 한 개인의 딜레마, 상업자본에 기반을 둔 소비사회의 기만성과 대중의 공통감각 등 우리 삶의 현재적 맥락에서 반추해야할 문제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책과함께·2만원>

/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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