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애라는 사랑법의 위험한 경계
2019년 07월 01일(월) 04:50 가가
주체적 개인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덩달아 자기애에 대한 인식 또한 크게 달라졌다. 자기애는 말 그대로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자기애의 강조는 오랫동안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이 올바른 사랑법으로 인식되어 온 것에 대한 이유 있는 비판이자 반성이라고 할 수 있다. 타인의 기대에 맞춰서 살다 보니 정작 ‘나’ 자신은 누구인지도 모르겠다는 깨달음에서 나온 성찰이다. 삶의 미덕은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는 학습 탓에 자기애는 오랜 동안 미성숙과 모자람의 표현일 뿐이었다.
이러다 보니 자신을 적극적으로 돌보고 배려하는 것은 영락없이 몰염치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이제 자기애는 당당한 사람의 모습으로 이해되는 현실이다. 생각해 보면 자기애가 나쁠 이유도 없고 대상애가 맹목적으로 미화될 필요도 없다. 사랑은 어떤 형태로든 대상을 돌보고 배려하는 마음과 감정이므로, 그 자체로서 모두에게 필요한 삶의 절대 조건이다. 문제는 대상이 아니고 애정의 방법과 정도 그리고 경계다.
과도한 자기애의 결말을 잘 보여 주는 이야기가 물가에서 봄철에 피는 수선화 신화다. 수선화를 뜻하는 나르키소스는 강물의 요정이 낳은 아들로 너무나 아름다워서 자신의 얼굴만 보지 않으면 오래 살 수 있는 운명이었다. 강의 요정은 아들이 물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한다. 이 덕분에 아들은 잘 자랐지만 자존심이 지나치게 센 탓에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르키소스는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말았다. 이날 이후 나르키소스는 자신과의 지독한 사랑에 빠졌고 물속에서 본 자신의 모습을 그리워하다가 그 물에 빠져 익사하고 말았다. 이 신화의 또 다른 결말은 자신에 대한 상사병이 너무나 깊어져서 먹지도 자지도 않고 호수만 들여다보다가 죽었다는 쪽이다. 나르키소스가 숨을 거둔 자리에서 피어난 꽃이 바로 수선화라고 한다. 그리고 극단적인 자기 집착을 보여 준 나르키소스에게서 유래된 ‘나르시시즘’이 곧 자기애를 뜻한다.
수선화 신화에서 표현된 자기애는 끔찍하고 절망스럽다.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을 느낄 수 없고, 오직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은 삶이 요구하는 절대 조건의 부정이고 거부이다. 누구나 세상 속에서 일정한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점에서 예외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오직 자신을 향한 욕망과 감정만 있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저주다.
늘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면서 이웃의 욕망을 욕망하는 삶도 결코 좋은 삶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세상 어느 누구와도 관계 맺지 못하고 나르키소스처럼 위험한 사랑의 ‘물’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은 더욱 불행한 일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요즘 유행하는 말로 ‘자뻑’이니 ‘관종’이니 하는 표현들도 비슷한 의미다. 나르키소스 방식의 자기애는 자기 부정과 모순으로 가득한 실현 불가능한 사랑이다. ‘나’는 직접적으로 소유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고 상호 관계의 틀 속에서 무단히 변화하고 성장하며 새롭게 ‘되어 가는’ 과정 속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자기애 현상은 정도가 지나쳐서 경계를 넘어선 것이 아닌가 싶다. 자기애가 더 나은 삶의 조건으로 강조되면서 내 것이라면 무엇이든 모든 것이 정당하고 귀하다는 태도다. 그래서 온갖 부정과 비리, 거짓이 넘쳐나도 잘못을 책임지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과도한 자기애가 사실상 깊은 자기혐오를 뒤집은 것이라는 점이다.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왜곡되어서 경계를 넘어서면 자기애로 위장된다는 의미에서 과도한 자기애는 자기혐오의 반증이다.
주체적 삶을 위한 자기애는 상생의 관계에 대한 파괴를 넘어서, 건설하는 힘으로 실천되어야 할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탁월한 힘의 가치는 ‘능히 할 수 있지만 애써 하지 않는 능력’을 통해서 빛을 발한다. 목적을 위해서 거짓과 위선이 사람들이 쉽게 택하는 방식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하지 않는 힘이 진정한 힘이며 건설하는 능력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요청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는 파괴적 자기애 대신 애써 건설하며 성장하는 건강한 자기애이다.
수선화 신화에서 표현된 자기애는 끔찍하고 절망스럽다.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을 느낄 수 없고, 오직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은 삶이 요구하는 절대 조건의 부정이고 거부이다. 누구나 세상 속에서 일정한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점에서 예외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오직 자신을 향한 욕망과 감정만 있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저주다.
늘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면서 이웃의 욕망을 욕망하는 삶도 결코 좋은 삶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세상 어느 누구와도 관계 맺지 못하고 나르키소스처럼 위험한 사랑의 ‘물’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은 더욱 불행한 일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요즘 유행하는 말로 ‘자뻑’이니 ‘관종’이니 하는 표현들도 비슷한 의미다. 나르키소스 방식의 자기애는 자기 부정과 모순으로 가득한 실현 불가능한 사랑이다. ‘나’는 직접적으로 소유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고 상호 관계의 틀 속에서 무단히 변화하고 성장하며 새롭게 ‘되어 가는’ 과정 속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자기애 현상은 정도가 지나쳐서 경계를 넘어선 것이 아닌가 싶다. 자기애가 더 나은 삶의 조건으로 강조되면서 내 것이라면 무엇이든 모든 것이 정당하고 귀하다는 태도다. 그래서 온갖 부정과 비리, 거짓이 넘쳐나도 잘못을 책임지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과도한 자기애가 사실상 깊은 자기혐오를 뒤집은 것이라는 점이다.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왜곡되어서 경계를 넘어서면 자기애로 위장된다는 의미에서 과도한 자기애는 자기혐오의 반증이다.
주체적 삶을 위한 자기애는 상생의 관계에 대한 파괴를 넘어서, 건설하는 힘으로 실천되어야 할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탁월한 힘의 가치는 ‘능히 할 수 있지만 애써 하지 않는 능력’을 통해서 빛을 발한다. 목적을 위해서 거짓과 위선이 사람들이 쉽게 택하는 방식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하지 않는 힘이 진정한 힘이며 건설하는 능력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요청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는 파괴적 자기애 대신 애써 건설하며 성장하는 건강한 자기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