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나라 외식업계에서는 베트남 음식의 강세가 유난히 두드러진다. 이미 20년 전쯤에 처음 소개된 베트남 쌀국수 ‘포’(Pho)는 어느새 냉면, 칼국수, 라면, 우동, 짬뽕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대중적인 면 요리로 자리 잡았다. 고기 육수, 고기 고명, 쌀가루로 만든 부드러운 면은 한국인도 충분히 선호할 만한 조합이다. 심지어 초창기에는 한국인이 거북해할 강한 향신료를 빼는 등의 노력을 통해 비교적 쉽고 빠른 속도로 현지화에 성공했다.

하지만 최근에 유행하는 베트남 음식에서는 좀 다른 경향성이 보인다. 포(Pho)만 하더라도 육수와 고명에 베트남 특유의 향신료와 향신채를 적극 사용함으로써 본고장의 맛을 강조한다. 월남쌈이나 스프링롤 정도에 머물던 사이드 메뉴도 분짜, 반쎄오, 넴루이 등 베트남 현지에서 즐기는 음식 그대로를 선보이고 있다. 베트남을 다녀온 여행자가 급격히 늘어나고 외래 음식을 수용하는 태도가 보다 개방적으로 바뀜에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다. 그럼 이왕에 소비하는 거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오늘날 베트남인의 조상이 나타난 것은 기원전 4세기다. 이후 다양한 고대 국가가 등장하고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를 꽃피우지만, 기원전 111년 중국 한나라에 병합된 뒤 939년까지 무려 1천 년 넘게 중국의 지배를 받는다. 베트남을 더러 ‘안남’이라 부르는 이유는 당시 베트남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중국이 설치한 ‘안남도호부’에서 유래된 것이다. 중국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 왕조를 세운 이후, 잠깐 동안 명나라의 지배를 받고 내부 분열을 겪게 되지만 결국 독자적인 문화를 구축하고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역사의 황금기를 맞는다. 오늘날 베트남의 국호인 ‘비엣남’(월남)도 이때 등장한다.

하지만 1883년 베트남의 전 국토는 다시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다. 치열한 독립운동과 8년 동안의 인도차이나 전쟁 끝에 1954년 베트남은 다시 독립을 쟁취한다. 하지만 북위 17°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나뉘는 분단의 비극을 맞는다. 북베트남을 근거지로 한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을 우려한 미국에 의해 베트남은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중국과 프랑스와의 독립 전쟁에서 승리한 베트남은 세계 최강대국 미국조차 몰아낸다. 그리고 1976년 하노이를 수도로 하는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무릇 음식은 사람과 문화의 교류를 통해 완성된 결과물이다. 그래서 음식은 역사의 어느 지점에선가 나타나고 역사 속에서 번져 간다. 역설적이게도 음식의 교류가 가장 급격하고 대규모로 이뤄지는 경우가 침략과 식민 지배 그리고 전쟁이다.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베트남 역시 식민 지배와 전쟁을 여러 차례 겪었다. 그것도 아주 혹독하게. 하지만 그때마다 베트남은 승리했고 결국엔 통일을 이루었다. 베트남 음식은 그런 베트남의 의지를 닮았다.

오늘날 베트남을 상징하는 음식이 된 쌀국수 ‘포’가 대표적이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 오래전부터 국수를 먹어 왔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은 쌀국수를 주로 닭 육수에 말아 먹었다. 하지만 베트남을 지배했던 프랑스인들은 기존의 쌀국수 제조 방식에 자신들의 요리법을 접목한다. 그래서 하노이 최초의 외국인 수석 주방장인 프랑스인 콜루는 프랑스식 소고기 육수인 ‘포토퍼’(pot-au-feu)를 이용한 쌀국수를 고안했다. 이때부터 포의 육수는 그 재료가 소, 돼지, 닭, 생선 등 그 무엇이든 상관없이 놀라울 정도로 깔끔하고 세련된 맛을 내게 된다.

포와 함께 베트남을 대표하는 음식인 ‘반미’(Banh Mi) 역시 마찬가지다. 반미는 밀가루로 만든 빵을 의미한다. 프랑스인이 바게트 사이에 햄과 야채를 끼워 샌드위치처럼 만드는 것을 본 베트남인은 이를 자신들의 방식으로 응용하기 시작한다. 버터 대신 돼지 간으로 만든 파테를 바르고 햄과 각종 향신채를 끼워 독자적인 맛을 창조한 것이다. 반미는 프랑스식 바게트 샌드위치와는 전혀 다른 특유의 풍미를 갖고 있으며 사용되는 재료에 따라 수만 가지 조합이 가능하다.

포와 반미는 오늘날 베트남을 넘어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음식이다. 세계 유수의 언론이나 여행 잡지에서는 항상 포와 반미를 ‘죽기 전에 꼭 먹어 보아야 할 음식’ 혹은 ‘세계 길거리 음식 베스트’에 선정하고 있다. 그리고 누구도 그 음식이 베트남의 전통 음식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육수를 내는 방식이, 바게트를 사용하는 것이 비록 식민 지배의 흔적이었다 할지언정 오늘날 베트남에서 혹은 전 세계에서 먹는 포와 반미는 베트남이 키운 다양한 식재료와 베트남인의 치열한 삶이 낳은 결과물이다. 베트남은 바로 이점에서 강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으며 포와 반미는 의심할 바 없는 베트남 전통 음식임을 확신한다. 그들에게 피지배의 역사는 상처를 넘어 현재의 자산이다.

음식의 역사를 분석함에 있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원조가 어디냐를 따지는 경우가 더러 있다. 대중이 소비하는 음식에 타 문화가 어떤 형태로 결합되었는지를 헤아리는 일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원조 논쟁에만 매달리다 보면 그 음식을 수용하고 발전시켜 온 사람들의 삶이 보이지 않는다. 음식 교류의 세계에서는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 훨씬 크고 중요하다. 어디서 왔느냐보다는 왜 선택했고 어떻게 뿌리내렸는지가 오히려 핵심이다. 바로 그 과정 속에 대중의 삶과 정서가 깃들어 있다.

대중의 선택과 일상이 거세된 원조 논쟁은 의미도 없을뿐더러 자칫 동시대를 살아 온 사람들의 삶 자체를 부정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우리는 가끔 그 점을 잊는 것 같다.<맛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