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구의 中國 인물 이야기 <133> 당나라 명장 고선지
2018년 05월 22일(화) 00:00 가가
서역 정벌한 고구려 유민 출신 장수
고선지(高仙芝, ?~755)는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당의 서역 정벌에 큰 공을 세웠다. 탈라스 전투에서 이슬람 연합군에 패했으며 안녹산의 난때 참수되었다.
일찍이 신장성 고자현에 해당하는 안서 지방에서 군무에 종사했다. 날쌔고 용맹하며 말 위에서 활을 잘 쏘아 절도사 부몽령찰의 천거로 안서 부도호, 도지병마사로 승진했고 4진 절도부사가 되었다. 747년 토번의 세력이 커지자 행영절도사로 임명되 1만 기병을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 1차 서역 정벌이었다. 이사업을 특공부대장으로 삼아 적군을 대파해 5천명을 목베고 1천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해 8월 소발물왕과 토번공주를 사로잡아 귀환했다. 공으로 안서 사진절도사가 되었다. 봉상청을 부사령관급인 판관에 임명하였다. 이후 정벌을 하러 나가면 항상 유후(留侯)로 삼아 부재시 직무를 대행토록 하였다. 봉상청은 산서성 임의현 출신으로 어려서 부모를 잃었으며 눈이 어그러지고 한쪽 다리가 짧았는데 수십일동안 하인이 되게 해달라고 간청해 부하로 삼았다.
750년 2차 서역 정벌에 나서 인도 북부인 걸사지방을 점령하였다. 발특목왕을 사로잡고 형 소가를 새 왕으로 삼았다. 또한 거짓으로 우즈베키스탄 타시켄트의 석국(石國)과 화약을 맺고 적이 안심한 사이 기습해 왕과 백성들을 사로잡아 귀환했다. 포로 중 늙고 약한 사람은 모두 죽였다. 다수의 사람과 재물을 취하였다. 공으로 751년 개부의동삼사로 승진했다. 이어 안사순을 대신해 하서절도사가 되었다. 그러나 석국 정벌은 커다란 후유증을 남겼다. 많은 젊은이들을 포로로 잡았고 재물과 보화를 전부 약탈하였다. 난을 피해 도망친 석국의 왕자가 주변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당의 만행을 호소했다. 석국을 돕기 위해 대식국(大食國)을 중심으로 이슬람 연합군이 결성되었다. 아바스 왕조의 군대와 당군이 격돌한 탈라스 전투가 시작되었다.
751년 3만의 군대를 동원해 대식국을 치고자 700여리 길게 행진했다. 양군이 대치하던 중 투르크계 갈라놀부가 반란을 일으켜 당을 협공했다. 온종일 싸웠으나 대패해 남은 병사가 수천명에 불과했다. 우무위장군 이사업의 권유로 간신히 적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쳤다. 장군 단수실이 “적을 피할 때는 멀리 도망해 용감함이 없고, 자신을 온전하게 하고 무리들을 버렸으니 어질지 않다. 다행이 도착했지만 어찌 부끄러움이 없는가”라고 말할 정도로 참혹한 패배였다. 전투 패배 후 하서절도사로 전임되었다. 장안에 입경한 후에는 우우림대장군에 임명되고 밀운군공에 봉해졌다.
755년 3도 절도사 안녹산이 난을 일으켰다. 파죽지세로 서진해 동도 낙양을 함락시켰다. 조정은 영왕 이왕을 원수로 고선지를 부원수로 삼아 동정토록 하였다. 특별 기병부대 등 5만명을 거느리고 장안을 출발하였다. 환관 변령성이 감군으로 군대를 감독토록 하였다. 하남성 섬군에 주둔했는데 봉상청이 건의하기를 “동관에는 병사가 없으니 만약 돼지 같은 적들이 동관으로 돌진하면 장안이 위험합니다. 섬군을 지킬 수 없으니 병사를 이끌고 먼저 동관을 굳게 지키는 것이 더 낫습니다.” 병사를 이끌고 동관으로 이동했는데 도중 적을 만나자 관군이 허둥지둥 달아나는 바람에 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 정도로 관군의 기강이 무너졌다.
그는 감군인 변령성과 자주 다투었다. 변령성이 상소를 올려 “봉상청이 적을 이용해 병사들을 흔들었고, 고선지는 섬군 땅 수백 리를 버렸으며 군사들의 식량을 도둑질하였습니다.”라고 고발했다. 대노한 현종은 칙서를 내려 둘을 목 베게 하였다. 변령성이 황제의 칙서를 선포하자 그가 말하였다. “내가 적을 만나서 물러난 것은 죽어도 마땅한 것입니다. 지금 위로는 하늘을 머리에 이고 아래로는 땅을 밟고 있는데, 황제가 내려준 식량을 훔쳤다는 것은 무고입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억울하다고 큰 소리로 부르짖어 그 소리가 땅을 흔들었다. 결국 고선지의 목을 베었다. 서역을 정벌한 명장의 허망한 최후였다. 후임 가서한이 동관 방어에 실패해 장안이 점령되고 현종은 사천으로 피난 가게 되었다.
일찍이 신장성 고자현에 해당하는 안서 지방에서 군무에 종사했다. 날쌔고 용맹하며 말 위에서 활을 잘 쏘아 절도사 부몽령찰의 천거로 안서 부도호, 도지병마사로 승진했고 4진 절도부사가 되었다. 747년 토번의 세력이 커지자 행영절도사로 임명되 1만 기병을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 1차 서역 정벌이었다. 이사업을 특공부대장으로 삼아 적군을 대파해 5천명을 목베고 1천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해 8월 소발물왕과 토번공주를 사로잡아 귀환했다. 공으로 안서 사진절도사가 되었다. 봉상청을 부사령관급인 판관에 임명하였다. 이후 정벌을 하러 나가면 항상 유후(留侯)로 삼아 부재시 직무를 대행토록 하였다. 봉상청은 산서성 임의현 출신으로 어려서 부모를 잃었으며 눈이 어그러지고 한쪽 다리가 짧았는데 수십일동안 하인이 되게 해달라고 간청해 부하로 삼았다.
그는 감군인 변령성과 자주 다투었다. 변령성이 상소를 올려 “봉상청이 적을 이용해 병사들을 흔들었고, 고선지는 섬군 땅 수백 리를 버렸으며 군사들의 식량을 도둑질하였습니다.”라고 고발했다. 대노한 현종은 칙서를 내려 둘을 목 베게 하였다. 변령성이 황제의 칙서를 선포하자 그가 말하였다. “내가 적을 만나서 물러난 것은 죽어도 마땅한 것입니다. 지금 위로는 하늘을 머리에 이고 아래로는 땅을 밟고 있는데, 황제가 내려준 식량을 훔쳤다는 것은 무고입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억울하다고 큰 소리로 부르짖어 그 소리가 땅을 흔들었다. 결국 고선지의 목을 베었다. 서역을 정벌한 명장의 허망한 최후였다. 후임 가서한이 동관 방어에 실패해 장안이 점령되고 현종은 사천으로 피난 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