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현의 ‘맛있는 이야기’] 농마국수와 밀면
2018년 04월 05일(목) 00:00 가가
1950년 흥남 철수 때 미군 상륙함(LST)을 타고 부산으로 피란 온 할머니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고모가 평안도 관촌에서 냉면집을 하셨어. 음식 솜씨가 참 좋았지. 가마솥에 국수 삶는 물을 하루 종일 끓이다 보니 방이 쩔쩔 끓었어. 겨울이면 독립운동 하시던 양반들이 많이 찾았다 그래. 냉면 먹으러 와서 며칠씩 쉬다 가고 그랬어. 단골 중에는 김일성도 있었어.”
할머니가 말한 관촌(官村)이 평안북도 운전군 덕원리에 있는 마을이며 가까운 곳에 경의선 역이 있다는 것까지는 확인했다. 하지만 더 이상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가끔은 타임머신 같은 게 있어 당시 관촌에 있었다는 냉면집으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엄동설한에도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건 투쟁을 하시던 양반들이 냉면 한 그릇에 위로받고, 아랫목에 누워 모처럼의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궁금했다. 그때를 재현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현장만큼은 직접 가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의 이런 바람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쩌면…’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갖게 되었다.
지난 4월 2일 남북 평화 협력 기원 남측 예술단원으로 참가한 걸그룹 레드벨벳이 평양 옥류관에서 냉면을 먹는 장면이 공개됐다. 내게는 예술단의 공연 그 자체보다 이 장면이 훨씬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지금까지 옥류관에서 냉면을 먹은 남한 측 인사는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젊은 세대를 상징하는 혹은 젊은 세대로부터 높은 인기를 받고 있는 아이돌 그룹의 사진을 보니 사뭇 느낌이 달랐다. 이전까지의 옥류관 냉면이 분단의 아픔을 치유하는 것이었다면 레드벨벳이 먹었던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는 상징처럼 보였다.
“만약 나에게 북한 음식 취재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일정을 잡을까?” 조금 성급한 감이 있지만 혼자서 이런 상상을 해봤다. 옥류관 냉면이 궁금하긴 했지만 나는 가장 먼저 함경남도 함흥시에 있는 ‘신흥관’부터 가고 싶었다. 북한 사람들은 흔히 “평양에 옥류관이 있다면 함흥에는 신흥관이 있다”고 말한다. 옥류관이 평양식 국수를 대표하는 곳이라면 신흥관은 함흥식 국수를 대표하는 곳이라는 의미다.
육수에 말아 먹는 건 평양냉면, 양념에 비벼 먹는 건 함흥냉면이라는 식의 구분은 분단 이후 남한에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과거에도 지금도 북한에서 평양식과 함흥식은 차가운 육수에 면을 말아 먹는 같은 방식을 취한다. 둘의 근본적인 차이는 면을 만드는 재료에 있다. 평양식은 메밀가루로 면을 만들고 함흥식은 감자 전분으로 면을 만든다. 감자 전분인 녹말을 북한에서는 ‘농마’라고하기 때문에 함경도 지방에서는 함흥식 국수를 ‘농마국수’라고 한다. 이 농마국수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매우 극적인 변화를 겪는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국군과 연합군은 전세를 뒤집으며 압록강 유역까지 북진한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된다. 육로로 후퇴하던 국군과 연합군은 1950년 12월 19일 흥남부두를 통한 해상 철수 작전을 결정한다. 애초 10만 명의 병력과 물자를 실어 나르려던 철수 작전은 소식을 듣고 몰려온 피란민으로 인해 규모가 두 배로 늘어났다. 결국 흥남 철수작전은 닷새 동안 20만 명에 가까운 군인과 민간인을 탈출시킨다. 이때 남쪽으로 피란 온 함경도 주민의 대부분은 부산에 정착했고 일부는 거제도에 정착했다.
부산에 도착한 함경도 주민들은 부산시 남구 우암동에 임시로 마련된 피란민 수용소에 우선 거처를 마련했다. 사정이 나은 이들은 판자촌에, 그마저도 형편이 안 되는 이들은 땅을 파고 거적을 덮어 생활했다. 어떻게든 거처를 마련하고 나니 먹고 살 일이 걱정이었다. 우암동 수용소와 가까운 곳에는 부두가 있었다. 이 부두에는 미군의 보급 물자 하치장과 창고가 있었다. 피란민 중 일부는 이곳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미군의 보급 물자 중에는 미국에서 구호 물자로 보낸 밀가루도 있었다. 피란민들에게 밀가루는 요긴한 식량이었다. 함흥 출신 피란민은 감자 전분 대신 밀가루로 농마국수를 만들었다. 농마 대신 밀가루를 썼으니 농마국수라 부를 수는 없었고 ‘밀국수’라는 이름으로 판매를 시작했다. 이 밀국수가 나중에 밀면이 된다. 부산을 대표하는 향토 음식 가운데 하나인 밀면은 이렇게 기구한 운명 속에서 만들어졌다. 부산에서 자라며 밀면을 일상의 음식으로 먹어 온 내가 밝혀 낸 밀면의 스토리는 여기까지다.
세상의 모든 음식은 저마다의 스토리를 가진다. 음식의 스토리는 원형과 전통 그리고 보편성과 지역성으로 구성된다. 원형과 보편성은 마치 신화와 종교처럼 변하지 않는 가치인 반면, 전통과 지역성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 지난 65년 동안 남과 북은 철저히 단절된 상태로 살아왔다. 삶이 분단되었듯 음식 역시 분단된 채로 남과 북의 환경 속에서 다르게 변해 왔다. 함흥식 농마국수와 부산의 밀면은 어쩌면 전혀 다른 음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원형과 보편성 같은 공통점이 반드시 있다고 믿는다.
한반도에 봄이 오고 있다. 이 봄바람을 타고 나는 함흥시에 있는 신흥관을 가보고 싶다. 늘 ‘애비 없는 자식’ 같아 보였던 밀면의 원형을 꼭 한번 먹고 싶다. 그리고 이 지면을 통해 신흥관 농마국수의 맛을 생생하게 전해드리고 싶다.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맛 칼럼니스트>
“고모가 평안도 관촌에서 냉면집을 하셨어. 음식 솜씨가 참 좋았지. 가마솥에 국수 삶는 물을 하루 종일 끓이다 보니 방이 쩔쩔 끓었어. 겨울이면 독립운동 하시던 양반들이 많이 찾았다 그래. 냉면 먹으러 와서 며칠씩 쉬다 가고 그랬어. 단골 중에는 김일성도 있었어.”
육수에 말아 먹는 건 평양냉면, 양념에 비벼 먹는 건 함흥냉면이라는 식의 구분은 분단 이후 남한에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과거에도 지금도 북한에서 평양식과 함흥식은 차가운 육수에 면을 말아 먹는 같은 방식을 취한다. 둘의 근본적인 차이는 면을 만드는 재료에 있다. 평양식은 메밀가루로 면을 만들고 함흥식은 감자 전분으로 면을 만든다. 감자 전분인 녹말을 북한에서는 ‘농마’라고하기 때문에 함경도 지방에서는 함흥식 국수를 ‘농마국수’라고 한다. 이 농마국수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매우 극적인 변화를 겪는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국군과 연합군은 전세를 뒤집으며 압록강 유역까지 북진한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된다. 육로로 후퇴하던 국군과 연합군은 1950년 12월 19일 흥남부두를 통한 해상 철수 작전을 결정한다. 애초 10만 명의 병력과 물자를 실어 나르려던 철수 작전은 소식을 듣고 몰려온 피란민으로 인해 규모가 두 배로 늘어났다. 결국 흥남 철수작전은 닷새 동안 20만 명에 가까운 군인과 민간인을 탈출시킨다. 이때 남쪽으로 피란 온 함경도 주민의 대부분은 부산에 정착했고 일부는 거제도에 정착했다.
부산에 도착한 함경도 주민들은 부산시 남구 우암동에 임시로 마련된 피란민 수용소에 우선 거처를 마련했다. 사정이 나은 이들은 판자촌에, 그마저도 형편이 안 되는 이들은 땅을 파고 거적을 덮어 생활했다. 어떻게든 거처를 마련하고 나니 먹고 살 일이 걱정이었다. 우암동 수용소와 가까운 곳에는 부두가 있었다. 이 부두에는 미군의 보급 물자 하치장과 창고가 있었다. 피란민 중 일부는 이곳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미군의 보급 물자 중에는 미국에서 구호 물자로 보낸 밀가루도 있었다. 피란민들에게 밀가루는 요긴한 식량이었다. 함흥 출신 피란민은 감자 전분 대신 밀가루로 농마국수를 만들었다. 농마 대신 밀가루를 썼으니 농마국수라 부를 수는 없었고 ‘밀국수’라는 이름으로 판매를 시작했다. 이 밀국수가 나중에 밀면이 된다. 부산을 대표하는 향토 음식 가운데 하나인 밀면은 이렇게 기구한 운명 속에서 만들어졌다. 부산에서 자라며 밀면을 일상의 음식으로 먹어 온 내가 밝혀 낸 밀면의 스토리는 여기까지다.
세상의 모든 음식은 저마다의 스토리를 가진다. 음식의 스토리는 원형과 전통 그리고 보편성과 지역성으로 구성된다. 원형과 보편성은 마치 신화와 종교처럼 변하지 않는 가치인 반면, 전통과 지역성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 지난 65년 동안 남과 북은 철저히 단절된 상태로 살아왔다. 삶이 분단되었듯 음식 역시 분단된 채로 남과 북의 환경 속에서 다르게 변해 왔다. 함흥식 농마국수와 부산의 밀면은 어쩌면 전혀 다른 음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원형과 보편성 같은 공통점이 반드시 있다고 믿는다.
한반도에 봄이 오고 있다. 이 봄바람을 타고 나는 함흥시에 있는 신흥관을 가보고 싶다. 늘 ‘애비 없는 자식’ 같아 보였던 밀면의 원형을 꼭 한번 먹고 싶다. 그리고 이 지면을 통해 신흥관 농마국수의 맛을 생생하게 전해드리고 싶다.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맛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