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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재의 세상만사] 힘 빼는 데 3년 걸린다는데

2017. 11.03. 00:00:00

사라지는 우리말들이 많다. ‘일다’란 말도 요즘엔 거의 쓰이지 않는다. 곡식이나 사금 따위를 그릇에 담아 물을 붓고 이리저리 흔들어서 쓸 것과 못 쓸 것을 가려낸다는 뜻이다. 또는 곡식 따위를 키나 체에 올려놓고 흔들거나 까불러서 쓸 것과 못 쓸 것을 가려내는 것. 여기에 나오는 ‘키’나 ‘체’나 ‘까부르다’ 같은 말들을 요즘 젊은이들은 알기나 할까.
모래를 일어서 사금(沙金)을 골라내거나 쌀을 일다라는 의미의 한자(漢字)로는, 일 ‘도’(淘)와 일 ‘태’(汰)가 있다. 이 두 자를 합치면 도태(淘汰)가 된다. ‘생존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면 힘을 길러야 한다’ 식으로 쓰이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로 그 단어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야 하겠다. 하지만 여럿 중에서 불필요하거나 부적당한 것이 가려지고 걸러지는, 그 도태의 대상이 바로 나라면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엊그제 초등학교 여자 동창생이 생일 선물로 커피 한 잔을 보내왔다. 나이로 보면 이미 ‘쉰 세대’인데도 어찌 알았는지 휴대전화를 통해서 선물을 보내온 것이다. 미리 커피 값을 지불하고 나중에 찾아 먹게 하는, 요즘 젊은이들이 곧잘 이용하는 방법이다. 이제 낙엽 지는 어느 날 커피숍에 들러 주인에게 휴대전화를 보여 주면, 공짜(?)로 커피를 마실 수 있을 것이다.
‘손주까지 본 할망구가 그런 것도 알고 참 기특하다’고 문자를 보냈더니 바로 답신이 왔다. ‘간편하면서도 돈도 적게 들고 작은 마음 전할 수 있어 자주 이용한다’고. ‘우리의 세월도 적잖이 흘렀으니 젊은이들과 공존하면서 서로 소통하고 도태되지 않으려면 많이 노력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어려움에 처한 국민의당

‘그대의 작은 마음 나에게는 참 크게 느껴지네’ 어쩌구 대충 인사치레를 하고 나서 ‘도태’와 ‘소통’의 의미를 곱씹어 보게 됐다. 한데 참 엉뚱하다. ‘소통’을 생각하면서 어찌해서 갑자기 국민의당이 머릿속에 떠올랐는지?
아마 나도 모르게 애정을 갖고 있었나 보다. 사랑에 빠졌을 때는 정작 사랑을 잘 모르지만 세월이 지나면 그것이 사랑이었구나 깨닫게 되듯이. 나 또한 국민의당에 대해 한동안 짝사랑을 해 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다 알다시피 국민의당은 지금 지난 대선 이후 상당히 어려움에 처해 있다. 여론조사 믿을 게 못 된다지만 지지율만 보더라도 집권여당인 민주당의 10분의 1수준이다. 한 자릿수 지지율에 그치며 바른정당이나 정의당과 ‘도토리 키 재기’를 하고 있는 형편이다. 한때는 최하위까지 떨어지기도 했으니 지난 총선 당시 지지율 26.7%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낄 만하다.
아무리 좋은 구경이라도 밤낮 보면 물리고, 아무리 듣기 좋은 노래도 자주 들으면 싫증 난다고, 안철수 대표의 ‘새 정치’ 구호에 많이들 식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얼마 전 바른정당과의 통합론은 호남 지역 지지자들의 이탈을 더욱 부추겼을 것이다.
인기 고공 행진 중인 민주당을 향해 너무 목소리만 높인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안 대표는 지난 8월 당권을 잡은 이후 줄곧 문재인 정부를 겨냥해 강성 발언을 쏟아내 왔다. 마치 그게 선명 야당의 길이기나 한 것처럼. 김이수 전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의 국회 인준안을 가결시키지 못한 것도 대표적인 실책이다. 캐스팅 보트(casting vote)도 좋지만 국민의당이 엄연히 ‘호남당’이라는 현실을 좀더 깊이 생각했어야 하지 않을까?
내 친구 하나는 태극권을 배울 때 사범으로부터 ‘어깨에 힘을 빼라’는 지적을 자주 받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이완(弛緩)이 필요한 것은 ‘힘 빼는 데 3년 걸린다’는 골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닌가 보다.
심지어 피아노 연주도 마찬가지다. 세이모어 번스타인은 피아노에서 가장 중요한 게 ‘약한 음’을 치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빠른 템포의 곡에 감동하지만 실력을 알 수 있는 건 ‘약한 음 치기’ 같은 것들이라고. 한국전에 참전하기도 했던 올해 아흔 살의 번스타인(지휘자로 유명한 레너드 번스타인과는 다른 인물이다)은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지금도 여전히 하루에 8시간씩 피아노를 연습한단다. 그가 학생들에게 자주 하는 말은 ‘힘을 빼라’는 것이다.
이야기가 잠시 옆길로 샌 듯하지만, 국민의당이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힘을 빼고 더욱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조급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요 당장의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 영광 찾을 방도 없는가

“행복에 이르는 길은 욕심을 채울 때가 아니라 비울 때 열린다.”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명언이다. 골프에서도 멀리 치기 위해서는 가볍게 쳐야 하고, 가볍게 치기 위해서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욕심에 사로잡혀서는 힘만 잔뜩 들어가고, 공은 쪼르르 굴러가거나 멀리 가지 못한 채 툭 떨어지고 만다. ‘버디가 보기 되는 것’도 다 욕심 때문이다.
내년 지방선거도 이제 몇 달 남지 않았다. 시시각각 선거는 다가오는데 집권여당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르니, 국민의당 입장에서는 조급해질 수 있고 욕심이 앞설 수도 있겠다. 물론 박지원 전 대표가 전남 도지사 선거에 나감으로써 최소한 전남에서는 새 바람을 몰고 올 수도 있겠고, 어떤 바람이 불지야 지금으로서는 섣불리 예상하기 힘든 상황이긴 하다.
이쯤에서 앞으로 안철수 대표의 행보가 궁금해진다. 몰락한 보수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가재는 게 편’이요 ‘초록은 동색’이라는 말을 듣더라도 당분간 정부 여당에 협조할 것인가. 이 또한 쉽게 점치기 힘들다. 하지만 혹시 대통령에 대한 욕심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보수 쪽으로 완전히 돌아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문제는 그럴 경우 호남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잘못하다가는 자신도 당도 다 죽는 결과를 초래할지 모른다.
따라서 욕심을 버릴 일이다. 뻔한 말이지만 내년 지방선거를 대비해 젊은 인재를 널리 구해야 한다. 당이 과거의 영광을 찾기 위해서는 그것밖에 묘약이 없다. 자신의 앞날보다는 당의 앞날을 생각해야 또 다른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마침 다당제를 선호하는 여론조사 결과가 최근 나왔다. 국민의당으로서는 고무적인 소식이다. 중선거구제로 선거 제도를 개편하는 것도 당이 살 수 있는 한 방법이겠지만, 아직은 먼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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