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누군가와 같이 하기란 힘들다. 25년간 같이 살아 온 부부가 두 달간 자유 배낭여행을 한 후 ‘당신이 그런 인간인 줄 몰랐다’며 이혼한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일상생활에서도 갈등은 있지만 그래도 정해진 규칙과 관습에 의해서 서로 조정을 한다.

그러나 여행, 특히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자유 배낭여행에서는 사사건건 부딪치게 된다. 이 숙소가 좋으니 나쁘니, 식사를 여기서 하자 저기서 하자, 버스를 탈까 기차를 탈까, 에어컨을 트느냐 마느냐 등등. 의견과 컨디션 그리고 취향이 다른 경우가 많다. 1류 호텔에서 묵는 짧은 패키지여행이라면 모를까 몇 달간의 배낭여행에서는 일상생활에서 모르던 상대방의 모습을 접하며 짜증을 낸다. 부부뿐이 아니라 부모·자식·친구 모두 비슷한 상황을 겪는다.

몇 달 전 대학생 조카와 2주일간 오키나와 여행을 했었다. 갈등을 피하기 위해 조카가 늦잠을 잘 수 있도록 여정도 느슨하게 짜고, 원하는 것을 최대한 들어주려고 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갈등이 생겼다. 조카는 배낭여행은 물론 일본 여행이 처음이라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충고의 말을 했었다. 일본에서는 차가 우측통행이니 길 건널 때 오른쪽을 먼저 보라든지, 여권·돈 분실을 조심하라는 말들을.

그러자 조카는 큰아빠가 너무 말이 많다고 불평하며 자신이 알아서 판단할 테니 안전과 훈육에 대한 말은 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하는 것이 싫었나 보다. 그 말을 들으니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다. 나도 늘 차 조심 해라, 밥 챙겨 먹으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면 짜증을 냈었다.

옛날 일을 생각하며 조카의 요구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여행 중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나로서는 아쉬웠다. 말을 하다 종종 자기 아빠에게 수없이 들었음직한 훈육적인 이야기가 튀어나오면 대화 자체를 기피했다. 조카는 어릴 때부터 학교나 가정에서 훈육적인 얘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그 말이 옳건 그르건 그 자체가 싫다고 했다. 하긴 모든 것을 잊고 싶어서 나온 여행인데 여행 중에 그런 이야기를 다시 들으니 얼마나 짜증이 났겠는가.

그러다 작은 사건이 있었다. 정작 베테랑 여행자라는 내가 휴대전화를 버스 안에 두고 내린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도로 찾기는 했지만 조카에게 면목이 없었다. 그리고 밥을 먹다가 국을 엎지르는 등, 내가 부주의한 모습을 보이는 반면 조카는 스스로 길도 잘 찾고, 낯선 상황에서도 상황 판단을 잘하며 헤쳐 나가고 있었다.

결국 1주일 만에 ‘나나 잘하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전체 여정과 숙소·교통 등의 큰 틀은 내가 짰지만 조카가 잘 헤쳐 나가는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그때부터 숙소나 장거리 이동은 함께 해도 구경은 따로 하기로 했다. 그러자 조카나 나는 서로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어려 보이던 대학생 조카를 어른으로 인정하고 나니 서로 자유로워진 것이다.

삶에서도 그런 것이 아닐까? 부모들은 아이들이 커도 늘 어리게만 본다. 자신들의 경험에 비추어 보며 자식들이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게 매사에 걱정하고 충고한다. 자식에 대한 애정에서 나오는 소리지만 다 큰 자식들은 잔소리로 생각한다. 효과도 없다.

결국 현실에서 부딪치고, 넘어지고, 깨지고, 실수하고, 실패하면서 생기는 상처들은 자식들 스스로 감수해야 하는 몫인 것 같다. 어른들이 그런 과정을 통해 성장한 것처럼 아이들도 실수와 실패를 통해 성장한다. 그걸 지켜보며 응원하는 것, 그것밖에 어른들의 할 일은 없어 보였다.

조카와 함께 한 여행은 다행히 잘 끝났다. 조카의 마음에는 여전히 내가 모르는 갈등과 불만이 있겠지만 세월이 지나면 좋은 추억으로 남고 그 잔소리도 그리워질 날이 있으리라 믿는다.

어른들의 할 일은 아이들 가슴에 씨앗을 뿌리는 것이며 그것을 싹 틔우고 키우는 것은 아이들 몫이다. 아니, 대학생을 ‘아이’라고 표현하는 나의 의식부터 변해야 될 것 같다. 고령화 시대를 맞아 늙고 약해진 채 오래 살아야 하는 어른들은 이제 자식들 걱정 이전에 자기 앞가림부터 먼저 해야 할 시대가 된 것 같다.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