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복의 '응답하는 사회학'] 가족은 무엇하러 있는가?
2016년 02월 25일(목) 00:00 가가
이혼은 1980년대만 하더라도 결혼 이후 5년 안팎의 젊은 부부의 경우에 가장 빈번하게 일어났다. 하지만 지금은 40대 50대 이혼이 더 많아졌다. 젊은 세대의 남녀 관계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황혼 세대에 역방향으로 영향을 미쳐, 나이가 들었어도 과거처럼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다.
1960년대에 태어난 386세대는 이혼을 터부시하는 분위를 깬 첫 세대였고 그 이후 세대에게는 불행한 결혼생활의 경우, 힘들긴 하지만 이혼은 인생에서 거쳐야 할 하나의 관문이 되었다. 1980년대 프랑스 유학시절 경험했던 현상이 이제 한국에서도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 급속한 사회변동의 과정에서 전통적 유대가 약화되고 남녀평등의 이념이 일반화되고 여성들의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면서 유사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1990년대 초, 호주의 시드니에 연구 자료를 수집하러 간 적이 있다. 어느 날 저녁 호텔 주변의 선술집에서 함께 간 동료 사회학자와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40대 말이나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두 사람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 중 한 사람이 나를 툭툭 건드리면서 자신의 그런 행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리 불온해 보이지 않는 평범한 중년 남자의 얼굴을 보고 나는 즉각적으로 ‘친구처럼(friendly)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두 사람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합석을 해도 좋겠냐고 물었다. 그래서 네 사람이 함께 앉아 맥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중년의 두 남자는 둘 다 이혼 상태에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부인들이 모두 다른 남자를 만나 가정을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말하면서 너희들이 가부장제 의식을 가지고 부인들을 억압한 것 아니냐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페미니즘이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것은 좋지만 여성들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면서 집안을 뛰쳐나가는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페미니즘은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상적인 가치가 아니라 자기들에게 고통을 주는 부정적인 사고라는 것이다.
그때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술 마시고 하는 푸념이나 하소연 정도로 취급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이방인들에게 자신들의 속 깊은 사연을 솔직하게 말하는 분위기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서 고맙다면서 맥주 값도 자신들이 지불했고 더운 날씨에 쓰고 다닐 밀짚모자를 선물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약 20년이 지났다. 나는 이제 그들의 처지를 그때보다는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들이 했던 말을 다 믿지는 않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에도 잘못 이해된 페미니즘이 가져오는 폐해가 발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 세월 동안 남성 중심 주의 사회에서 억압받아 온 여성들이 해방되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적극 동의한다.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남녀평등은 실현되어야 한다. 그러나 해방된 여성들은 이제 다시 남성들과 평등하고 평화롭고 조화롭고 호혜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여성은 해방되었는데 남성들이 너무 천천히 변하고 있다는 주장도 맞다. 그러나 여성해방이 마치 여성들이 ‘명예 남성’이 된 듯 과거 남성들이 여성에게 대했던 방식으로 남성들을 대한다면 그 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어쩌면 남성들이 더 고생을 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남녀 평화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상호 무시와 일방적 억압으로는 온전한 관계를 이룩할 수 없다.
가족은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는 사회에서 개인을 지켜 주는 마지막 보루다. 이상적인 가족생활은 사랑과 배려의 부부 관계로 시작되어 지지와 격려의 부모·자녀 관계로 이어진다. 그런 사랑과 상호 인정의 호혜적 관계 속에서 개인은 안정감과 자존감을 유지하며 자신의 삶을 창조적으로 꾸려 갈 수 있다.
병든 가족 관계는 구성원들에게 구속으로 작용하거나 무의미하게 느껴지며 언젠가 깨질 위험성을 안고 있다. 부부 관계는 가족생활의 바탕이다. 부부 관계가 어긋나면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도 망가진다.
가정은 오랫동안 가족 이기주의의 온상이요 여성 착취의 도구라고 많은 비판을 받아 왔다. 그러나 가정은 인간이 태어나고 관계 맺고 살아가는 가장 원초적인 조직이다. 그 가정을 신뢰와 사랑, 지지와 격려의 장소로 만들지 않고는 사람다운 삶을 살기 어려울 것이다.
이제 가족은 비판의 대상에서 재구성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아내와 남편, 엄마와 아들, 아버지와 딸 등 가족 내의 상호작용이 서로를 지지하고 인정하고 격려하고 배려하는 관계로 바뀌고, 가족 안에서 배운 인간관계의 방식이 가족 밖에서도 통용될 때, 세상은 그만큼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다.
<사회학자·작가>
1960년대에 태어난 386세대는 이혼을 터부시하는 분위를 깬 첫 세대였고 그 이후 세대에게는 불행한 결혼생활의 경우, 힘들긴 하지만 이혼은 인생에서 거쳐야 할 하나의 관문이 되었다. 1980년대 프랑스 유학시절 경험했던 현상이 이제 한국에서도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 급속한 사회변동의 과정에서 전통적 유대가 약화되고 남녀평등의 이념이 일반화되고 여성들의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면서 유사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중년의 두 남자는 둘 다 이혼 상태에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부인들이 모두 다른 남자를 만나 가정을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말하면서 너희들이 가부장제 의식을 가지고 부인들을 억압한 것 아니냐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때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술 마시고 하는 푸념이나 하소연 정도로 취급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이방인들에게 자신들의 속 깊은 사연을 솔직하게 말하는 분위기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서 고맙다면서 맥주 값도 자신들이 지불했고 더운 날씨에 쓰고 다닐 밀짚모자를 선물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약 20년이 지났다. 나는 이제 그들의 처지를 그때보다는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들이 했던 말을 다 믿지는 않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에도 잘못 이해된 페미니즘이 가져오는 폐해가 발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 세월 동안 남성 중심 주의 사회에서 억압받아 온 여성들이 해방되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적극 동의한다.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남녀평등은 실현되어야 한다. 그러나 해방된 여성들은 이제 다시 남성들과 평등하고 평화롭고 조화롭고 호혜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여성은 해방되었는데 남성들이 너무 천천히 변하고 있다는 주장도 맞다. 그러나 여성해방이 마치 여성들이 ‘명예 남성’이 된 듯 과거 남성들이 여성에게 대했던 방식으로 남성들을 대한다면 그 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어쩌면 남성들이 더 고생을 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남녀 평화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상호 무시와 일방적 억압으로는 온전한 관계를 이룩할 수 없다.
가족은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는 사회에서 개인을 지켜 주는 마지막 보루다. 이상적인 가족생활은 사랑과 배려의 부부 관계로 시작되어 지지와 격려의 부모·자녀 관계로 이어진다. 그런 사랑과 상호 인정의 호혜적 관계 속에서 개인은 안정감과 자존감을 유지하며 자신의 삶을 창조적으로 꾸려 갈 수 있다.
병든 가족 관계는 구성원들에게 구속으로 작용하거나 무의미하게 느껴지며 언젠가 깨질 위험성을 안고 있다. 부부 관계는 가족생활의 바탕이다. 부부 관계가 어긋나면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도 망가진다.
가정은 오랫동안 가족 이기주의의 온상이요 여성 착취의 도구라고 많은 비판을 받아 왔다. 그러나 가정은 인간이 태어나고 관계 맺고 살아가는 가장 원초적인 조직이다. 그 가정을 신뢰와 사랑, 지지와 격려의 장소로 만들지 않고는 사람다운 삶을 살기 어려울 것이다.
이제 가족은 비판의 대상에서 재구성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아내와 남편, 엄마와 아들, 아버지와 딸 등 가족 내의 상호작용이 서로를 지지하고 인정하고 격려하고 배려하는 관계로 바뀌고, 가족 안에서 배운 인간관계의 방식이 가족 밖에서도 통용될 때, 세상은 그만큼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다.
<사회학자·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