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행지에서든 배울 게 있다. 내가 인도 여행에서 배운 것 중의 하나는 체념도 필요한 미덕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인도 여행을 여섯 차례 했고 그곳에서 여행한 기간이 약 1년 반 정도 되어서 지금은 익숙하지만, 처음에 몇 개월간은 너무도 힘들었다.

첫 여행에서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은 종교에서 오는 계급제도의 모순, 엄청난 빈부 격차를 모두 카르마(업), 신의 의지로 돌리는 인도인들의 모습이었다. 구걸한 돈으로 꽃다발을 사서 신상 앞에 바치는 사람들, 혹은 명상이나 요가에 심취한 채 비참한 현실을 외면하며 모든 것을 신 혹은 카르마(업)로 설명하는 인도인들을 보면서, 그동안 ‘하면 된다’ ‘안되면 되게 하라’는 정신을 교육받아 온 나는 안타깝기도 했다.

그런 내가 생각을 바꾸게 된 계기는 10살 정도 먹은 어느 소녀와의 만남이었다. 소녀의 아버지는 바람이 나서 다른 도시로 도망갔고, 어머니는 신전에서 재스민 꽃다발을 만들어 팔며 생계를 이어 가고 있었다. 집이 없는 그들은 신전에서 잤고 돈을 좀 벌면 세끼를 먹지만 보통 두 끼, 없으면 한 끼도 먹는다고 했다. 그들이 먹는 것이라야 짜파티(밀개떡) 혹은 커리 정도였을 것이다.

나는 그 아이가 불쌍해 보여 물었다.

“하루에 한두 끼 먹으면 배고프겠구나.”

“노 프로블럼.”(괜찮아요)

아이는 관광객들로부터 배운 영어·프랑스어를 곧잘 했다.

“하루 이틀이면 몰라도 계속 그러면 문제잖아?”

잠시 망설이던 아이는 여전히 ‘노 프로블럼’이라고 얘기했다. 소녀의 그런 모습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 소녀의 앞날은 암담하다. 엄마가 재스민 꽃을 만들어서 얼마나 벌 것이며, 아이 교육은 어떻게 할 것이며, 그 아이의 결혼, 그 후 대를 이어가는 빈곤…. 그런데 소녀는 ‘노 프로블럼’이라고 말하며 해맑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모습은 나에게 작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현실 도피 같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좌절하고 극단적으로 삶을 포기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현실을 변화시킬 힘이 없다면 차라리 ‘노 프로블럼’이라 말하며 현실의 무게를 덜어 내는 것도 지혜가 아닐까? 그런데 나중에 ‘노 프로블럼’이란 말 속에는 ‘세상만사 신의 뜻대로 되는 것이니 문제될 게 없다’는 뜻이 담겨져 있음을 알았다.

이런 말은 우리 전통 사회에도 있었다. 불행한 일을 당하거나, 일이 뜻대로 안 될 때 ‘팔자가 그래서 그렇지’라거나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면서 받아들였던 것이 그것이다. 또 불교에서는 ‘업보’를 얘기하고, 기독교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얘기한다. 체념이 있어야 상처가 치유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힘이 솟는다.

엄청난 속도로 근대사회를 만든 우리는 그동안 ‘하면 된다’의 정신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체념은 버려야 할 악덕이었다. 하지만, 이제 ‘해도 안 되는’ 현실이 펼쳐지고 있다. 명퇴가 일반화되고 ‘칠포 세대’란 말이 나올 정도로 누구나 어려운 세상이다. 이 상황을 타개할 뾰족한 묘책이 보이질 않을 때는 체념과 포기, 마음 내려놓기도 미덕이 되지 않을까?

생을 포기하거나 세상의 부조리를 인정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노력하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당연한 인간의 권리일 것이다.

그러나 가끔은 체념과 인내도 필요하다. 조급하게 모든 것을 지금 당장 해결하려는 자세는 우리의 삶을 더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남들이 다 원하는 좋은 직장, 안락한 삶을 살고자 하면 삶은 더 힘들어진다. 누구나 승리자가 될 수는 없다. 그 길을 가다가 가끔은 깨끗이 체념하고 다른 길을 찾는 것도 지혜인 것 같다. 남과 다른 길을 용감하게 가는 행위, 그러다가도 내 뜻대로 안되면 좌절하지 말고, ‘노 프로블럼’ 하며 다시 새로운 길을 찾는 유연성이 필요한 시대인 것 같다. 그때 내면에서 솟구치는 초월적인 힘이 우리를 인도하지 않을까?

앞서간 많은 현자들이 그런 말을 했고 나 역시 그 말에 힘입어 오늘을 살고 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노 프로블럼!’ ‘괜찮아!’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면 사방천지가 길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