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상원 정보위원회는 지난 2014년 12월, ‘CIA의 테러용의자에 대한 고문실태 보고서’를 공개했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01년 9·11사건 이후 알 카에다 대원들을 상대로 CIA가 잠 재우지 않기, 물 고문, 성 고문, 장기간 독방 수용 등 다양하고 잔혹한 고문을 시행했다고 합니다.

보고서에는 “수면 제한이 고문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고문 방법을 개발하고 실행하는데 심리학자가 참여했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덕분에 심리학자 제임스 미첼(James Mitchell)과 브루스 제슨(Bruce Jessen)이 세운 회사는 고문 프로그램을 개발한 대가로 CIA로부터 무려 8100만 달러를 받았다고 합니다.

‘선진 심문(enhanced interrogation)’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CIA가 자행한 심문은 이런 것입니다. 테러 용의자로 의심되는 사람을 불이 환하게 켜진 흰색의 텅 빈 방에 가두고 잠을 자지 못하게 하고, 큰 소음을 반복적으로 듣는 고문을 가했습니다. 고문의 목적은 ‘(대상자가) 반항하거나 정보 제공을 거부할 어떤 능력·의지도 남지 않는 상태로 만드는 것’이었고 이는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라는 심리학 이론을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심리학 지식을 이용하여 인간 심리의 어떤 부분이 약한지 파악해서 그 부분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과학의 연구결과를 이용, 아무리 강한 신념이라도 극한의 공포와 고통을 주는 고문에 굴복하도록 만드는 거지요.

고문에 심리학 연구를 도입한 제임스 미첼 박사는 언론과 인터뷰에서 “나는 그저 정부 고위관료로부터 나라를 위해 일 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사람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말이죠. 많이 듣던 소리입니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의 말이었고, 국정원 해킹사건에서 되풀이 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위력과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보면서 “나는 죽음의 신,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고 자책합니다.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하고 평화운동에 헌신한 그는 “우리는 대단히 끔찍한 무기를 만들었고 이는 세상을 한순간에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우리는 과학이 인간에게 유익하기만 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과학적 측면에서 연구된 내용들은 언제든지 옳지 않은 일에 악용될 수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일반인들이 가질 수 없는 정보와 기술을 갖고 있습니다. 비대칭적인(information asymmetry) 힘을 갖는 것이지요. 객관성을 가장한 중립이 아니라 윤리적 건강함이 늘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 전문가가 가져야할 윤리의 핵심은, 강자가 약자에 대해 지켜야 될 도리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실험실은 살아있다는 관점에서 사람을 보지 못하는 곳이었다. 데이터와 숫자로만 모든 걸 다루는 곳이고, 사람도 기계의 한 부분이다. 실험실을 벗어나 자연 속에 나와 보니 사람이 살고 있었고, 새가 울고 꽃이 피어있었다. 인간의 감각으로 방사능을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의 전문적인 연구를 반핵과 반원자력 운동으로 방향 전환한 다카기 진자부로의 삶은, 오늘의 미첼 박사 같은 전문가들이 반드시 비춰 보아야할 ‘윤리적 거울’입니다.

심리학자들이 안보와 정의를 운운하면서 고문을 합리화하고 변명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며칠 전 미국심리학회(APA) 이사회는 CIA의 고문 실태 보고서가 나온 후 7개월 동안 자체 조사를 한 뒤,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앞으로 “내부 지침을 검토해 회원들이 심문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도록 금지할 것”이라고 합니다. 미국 국방부나 중앙정보국(CIA)가 국가안보와 관련된 범죄 혐의자를 심문할 때, 심리학회 회원들이 관여하면 윤리규정 위반으로 간주하고 책임을 묻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고문이라는 부끄러운 모습을 과감하게 드러내고, 그 잘못을 바로 잡는 미국과 심리학회의 자기 반성의 모습에서 미국이라는 나라의 건강함과 함께 일그러진 우리의 모습도 겹쳐집니다.

<광주 트라우마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