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생(書生)의 문제의식과 상인(商人)의 현실감각으로 하는 것이 정치”라 했던 고(故) 김대중 대통령의 말씀은 실천적 리더십의 핵심을 찌른 통찰이다. 이렇게 쉬운 말로 정치 리더십을 정의하다니 정말 ‘선생님’이시다. 현실 정치를 하는 사람이나 또는 하려는 사람은 물론, 정치인을 선택하고 공직자를 선출하는 국민도 이 기준을 치밀하게 따져봐야 할 것이다.

이 말을 천착해 보자. 첫째, ‘문제의식이 없는 사람은 정치하지 마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겠다. 이러한 해석은 금방 수긍이 된다. 민주주의와 남북 평화라는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뚜렷했기에 김대중 선생은 평생 ‘행동하는 양심’으로서 수미일관(首尾一貫)할 수 있었다. 남이 만든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속에서 끓어오르는 ‘의식’이 생생했고, 그래서 당장의 현상적 문제만을 풀려고 하는 게 아니라 구조적인 핵심을 건드릴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런데 현실정치권에 있는 사람들 중에 자기의 과제를 가지고 있는 정치인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진정한 문제의식이 있는 정치인이 얼마나 있나? 그렇다면 문제의식 없이 어떻게 용기가 나오겠는가?

둘째, ‘현실감각만 있는 사람은 정치하지 마라!’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김대중 선생께서 말씀하셨던 현실감각이란 ‘현실 메커니즘을 꿰는 정치를 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돈과 제도와 조직과 사람들의 욕망이 얽혀서 일어나는 인간사회라는 복잡계를 이해하고 헤쳐 나가는 능력 없이는 그 어떤 작은 것 하나 현실에서 실천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한심하게도 현실감각을 ‘이권 감각’으로 오독하는 정치인들이 워낙 많다. 지역구에 예산 당겨오는 것이 현실감각이란 말인가? 표 줄 사람들에게만 떡 하나 더 주려고 하는 사람이 정치인 자격이 있는가? 오직 자신의 공천과 당선에만 신경 쓰는 사람이 무슨 정치인이란 말인가? 이들은 자기 이익에 따라 표변하는, 장사꾼보다 훨씬 더 저질인 정치꾼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정치 꿈도 꾸지 마라!’는 해석은 또 어떠한가? 정치인들 중에는 책을 지금도 읽고 있을 것 같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금방 구별되지 않는가? 젊은 한때 읽어 봤던 책으로 밤낮 없이 올드송만을 부르고 있거나, 사실은 한 번도 자신의 시각으로 책을 읽어 본 적이 없거나, 자서전 정도를 책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들은 이 시대 정치인으로서의 자격이 없다. 눈도장 찍고 발품 파는 정성만큼이나 이 시대의 고민을 안은 책을 끊임없이 찾고 읽고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면, 우리는 그 정치인에게 희망을 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관건은 서생과 상인을 겸비하는 것이다. 문제의식과 현실감각이 같이 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쪽만 기형적으로 발달한 인물이 만들었던 참극을 많이 보아 왔다. 철저하게 상인 출신이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은 특정 소수를 위한 수익 모델을 창출하려고 국가를 운영했다. 공적인 문제의식이 전혀 없었다. 어떻게 그 본색을 국민들이 그렇게 몰랐었을까 이상할 정도다. 하기는 지금 미국에서 장사꾼 출신인 트럼프가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1위를 달리고 있는 현실을 보자면, 선진사회라는 미국도 사기꾼에 속아 넘어가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사실 서생의 문제의식도 상인의 현실감각도 전혀 없는 사람을 대통령(박근혜)이 되게 한 우리 사회이니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오로지 선거 이기기에만 유능한 ‘선거의 여왕’, 왜 대통령이 되려고 했는지 문제의식을 전혀 찾을 수 없는 대통령,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려 들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모른 척하는 능력만 한없이 발달한 대통령, 서생이지도 상인이지도 못한 대통령을 보는 이 답답함을 어찌하랴?

하지만 그래도 포기하기엔 이르다. 다른 정치인들을 자세히 뜯어보며 희망을 품어 보자. “저 사람은 평생 붙들고 있는 분명한 주제가 있어. 저 사람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한이 있어. 저 사람은 세상을 바꾸어 놓겠다는 꿈이 확실해. 저 사람은 녹록지 않을 것이야. 타협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지만 절대로 포기를 모를 것이야. 저 사람은 지금도 책을 읽고 있는 사람임에 분명해.” 우리는 우리에게 딱 맞는 수준의 정치인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 보자.

<전 국회의원·도시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