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여당 원내대표 축출은 결국 일어나고야 말았다. 160명의 여당 국회의원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꼭두각시 노릇을 하며 정당민주주의를 붕괴시켰다. 행정부가 국회를 능멸하던 반세기 전 망령이 되살아날 판이다. 도대체 이 시대의 리더십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설마 했었다. 이런 수준일 것이라고는. 첫째, 이렇게 ‘과거지향적’일지는 차마 몰랐다. 한(恨)이란 꼭 나쁜 것이 아니다. 과거의 한을 뛰어넘는 꿈을 펼치면 훌륭한 대통령이 되지만 과거의 한에 얽매이면 최악의 정치인이 된다. 그런데 왜 돌아가려고만 하는가?

둘째, 이렇게 ‘무능’할지는 차마 몰랐다.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는 비상 국정 사안들이다. 경제, 외교, 민생과 같이 복합적이고 뜻대로만 되지 않는 국정과는 달리 성의를 보이면 오히려 대통령에 대한 신뢰를 올릴 수 있는 위기다. 그런데 어떻게 이리 절절매고, 책임을 회피하고, 일을 피하려 드는가?

셋째, 이렇게 ‘최저 에너지’일 줄은 설마 몰랐다. 희망의 기운을 품을 줄도, 뿜을 줄도 모른다. ‘된다, 될 것 같다, 해 보자, 신난다’ 하는 분위기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누가 발목을 잡는가? 누가 연과 줄을 부활시키는가? 누가 ‘적자생존’에 목을 매는가?

넷째, 이렇게 ‘여성성’에 무지할지는 차마 몰랐다. 자기 안의 여성성과 남성성을 잘 조화시키는 리더만이 균형을 이루는 철학으로 진정한 실천을 할 수 있다. 한쪽이 불구가 되면 제대로 걸을 수도, 마음껏 날 수도 없다. 여성 대통령이 여성성에 무지하다니 이 무슨 불행인가? ‘결혼도 못해 본, 아이도 안 키워 본’ 같은 폄하는 결코 올바르지 못하다. 하지만 여성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대통령은 무엇을 하였는가?

이 시대의 후배 여성들에게 내가 곧잘 얘기해 주는 원칙들을 박근혜 대통령은 온통 부정한다. “동정을 얻으려 들지 마라, 감정적이 되지 마라, 겉모습으로 홀리려 들지 마라, ‘명예 남성’이 되지 마라!” 같은 원칙이다. 한마디로 속 빈 강정, 빛 좋은 개살구가 되지 말고 스스로 독립하고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더 큰 사회를 위해서 여성성을 쓰라는 이야기다.

박근혜 대통령은 선거 때만 되면 동정표 얻는 데 능수능란하다. 악수 투혼, 붕대손 투혼을 하더니만 이제는 눈물 투혼, 병상 투혼까지 한다. 아무리 선거 묘수라 하더라도 대통령이 보일 모습은 아니다.

공식석상에서 ‘배신’이라는 감정적 어휘를 입에 올리며 원색적으로 화를 내고, 여야 정당 대표들에게 악수는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고, 청와대 회의에 국회의장을 초대하지 않는 ‘뒤끝 작렬’은 엔간한 남자에게도 도저히 용납 안 되는 감정적 태도다. 맵시와 스타일은 남성, 여성에게 공히 필요한 것이지만 특정 집단을 향한 동정표와 감정몰이의 액세서리로 활용되어서는 곤란하다. 정치란 쇼 비즈니스만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본인이 여자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같은 여성들에게 인색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와 성공과 권력을 추구하는 남성처럼 구는 여성을 흔히 ‘명예 남성’이라고 부르곤 한다. 우리의 여성 대통령이 시대역행적인 ‘명예 남성’을 추구한다면, ‘실력과 공정과 통합과 평화’를 지향하며 열심히 뛰는 이 시대 보통 여성들은 대체 어떡하란 말인가?

솔직히 여성 대통령이기에 대통령으로서 성공하기를 나는 더 바랐다. 조건도 충분했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처럼 비주류 소수파도 아니다. 김영삼·이명박 대통령처럼 여당 내에 강력한 정적이 있지도 않다. 강고한 고정 지지층이 있고 우호를 넘어 편애조차 하는 주류 언론들도 있다. 무엇보다 대통령 공약들이 이 시대 정신을 담고 있었다. 그 공약들은 다 어디로 던져 버렸나? 립서비스뿐이었던가? 약속의 정신은 어디로 가고 권력투쟁 본능만 남았나?

“여자라서 그런가?” 요즘 내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을 옹호·옹립하던 실버층·리더급 사회 인사들이 사석에서 입에 올리는 말이다. 제발, 박근혜 대통령의 실패를 여성이라서, 여성이기 때문이라 보지 말아다오!

<전 국회의원·도시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