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일본 NHK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재조명하는 다큐를 방송했다. 이 다큐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일왕의 등장이었다. 일왕은 대책본부를 방문해서 보고를 받는다. 여기까지는 일상적 장면이다. 입헌군주국에서 형식상 국가원수인 일왕이 국가적 재난의 현장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한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담당자가 방사능 오염지역의 주민을 모두 소개(疏開)시키고 있지만, 한 노인이 이를 거부하며 아직 오염구역 내에 머물러 있다는 브리핑을 한 것이다. 순간 일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개를 거부하는 주민을 직접 만나겠노라고 선언한다.

당황한 수행원들의 만류에 일왕은 단호한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오염구역으로 직접 들어간다. 수행원과 기자들도 뒤를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일왕은 오염지역 내의 주민을 찾아가 만난다. 그리고 노인의 손을 잡고 말한다. “모두가 본인 부덕의 소치다. 통렬히 반성한다.” 일본인, 특히 노령세대가 일왕에 대해 가진 정서를 감안하면 노인에게는 실로 충격적인 순간이다. 노인은 일왕 앞에서 대성통곡을 한 후 고집을 꺾고 결국 소개에 응한다.

상식적이지 않은 장면이다.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일차적 원인은 지진과 쓰나미다. 이 자연재해는 일왕의 책임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입헌군주국인 일본에서 일왕이 가진 권한과 책임의 범위를 감안하면 일왕의 책임을 물을 만한 소지는 전혀 없다고 봐도 옳다. 그럼에도 일왕은 스스로 방사능 구역으로 들어가 피해 주민의 손을 잡고, ‘내 탓’ 이라고 말했다.

일본 연구서의 고전인 ‘국화와 칼’에서 저자인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의 천황은 태평양의 섬들에서 발견되는 신성한 추장(Sacred Chief)과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그 추장이 머리를 숙인 것이다. 아무도 왕의 책임이라 여기지 않는데도 그랬다.

이것이 위선이건 진심이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실제 누구의 책임인가는 나중에 따져도 좋다. 하지만 최고 지위에 있는 자가 스스로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순간, 원전사고로 패닉에 빠졌던 일본인들이 얼마나 큰 심정적 위로를 받았을지는 미루어 짐작이 간다. 원래 일본이 한 손에 국화를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든 이중적 민족이라 하더라도, 또 이 장면이 이중성의 전형이라 하더라도, 정치적 측면에서 대단히 인상적인 효과를 갖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권위를 가진 자는 태생적으로 머리를 숙이는 것을 기피한다. 사과 자체를 권위에 대한 손상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는 다르다. 최고 권위자가 머리를 숙일 때 대중은 위로받고 상처와 앙금을 녹일 수 있게 되고, 권위는 도리어 강화된다. 일왕은 그 한 장면으로 반대자들의 입을 최소 몇 년은 틀어막는 데 성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일본과 달리 이런 ‘해원 상생’의 과정이 없다. 대통령부터 관료 정치인까지 모두 사과에 인색하다. 사과는 곧 권위의 붕괴라고 여기는 탓이다. 그래서 곧잘 등장하는 표현이 ‘유감’이다. 유감이라는 표현에서 진정성을 느낄 사람은 유치원에도 없다.

지난 수요일, 사태 수습에 골몰해야 할 삼성병원 원장을 서울에서 오송까지 불러 질책하는 대통령을 보며, 국민들은 안도는커녕 서운함을 느끼고 있다. 국가 방역망이 뚫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었으면, 사과가 먼저고 질책은 다음이다. 실제 잘잘못은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 국민은 전염에 대한 공포와 함께, 우리나라가 확산 거점으로 취급받고 여행 기피국이 되어가는 과정에 큰 상처를 받고 있다. 질병에 대한 실체적 공포만큼이나 당혹과 분노, 수치도 큰 것이다.

국민의 이런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정부는 국민의 지지나 이해를 구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정부와 대통령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유감’과 같은 유희적 수사가 아닌, 진심 어린 위로다. 그 다음 총리대행이 아닌 대통령이 직접 대책위원장을 맡아 총력을 기울이는 모습이라도 보여주어야 한다. 전례가 없거나 과잉이라고? 그게 바로 정치다.

<지식나눔 네트워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