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이란 단어는 매력적이다. “옛 것을 보내고 새 것을 맞는다.” 들으면, 설레기까지 한다. 왜일까? 우리 대부분은 지난 시간을 ‘절망’으로 기억한다. 무엇 하나 이룬 것 없이 시간만 흘려보냈다는 자괴감으로 괴로워하는 게 보통의 인간이다.

사람은 시간을 이기지 못한다. 분절된 시간은 그 마디마다 과거를 잊고 새 출발할 명분을 제공한다. 지난 시간의 절망을 인위적으로라도 잊으란 것이 시간을 나눠놓은 이유일 거다.

그 효과는 엄청나다. 우리 대부분은 지난해와 새해를 엄격히 구분한다. 그리고 다짐을 한다. 과거는 흘러갔으니 이제 새 출발을 하자고.

하나, 해는 바뀌었지만 풍경은 변함없다. 진눈깨비가 그야말로 추적추적 내리는 날, 폐지 리어카를 끌고 도로 한 복판을 기다시피 걷는 노파도 여전하다. 영하 10도를 훌쩍 넘는 날씨, 어느새 차디찬 바람 통로가 되어버린 지하철 계단에서 달팽이처럼 웅크리고 있는 노숙자도 그대로다.

70m 상공의 굴뚝, 사방 1m의 좁은 공간에서 두 명의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은 칼이 된 바람을 여전히 맞고 있다. ‘하늘 감옥’에서 이들은 석고상이 되어가고 있다. 바닷속은 또 어떤가. 깊은 물속 세월은 멈췄다. 지난 봄 영문도 모른 채 ‘바다 감옥’에 갇힌 9명이 언제 햇빛을 볼 수 있을지 누구도 모른다.

우리를 둘러싼 풍경은 정물이다.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메를로 퐁티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폭력은 인간의 숙명이다. 인간의 폭력성은 생명 유지를 위해 필수적이다.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한다. 이는 다른 그 무엇은 죽어야 한다는 걸 뜻한다. 어쩔 수 없다. 인간 생명의 토대인 다른 무언가의 희생은 자연계의 순환과정일 뿐이다. 생명 유지를 위한 폭력성은 그런대로 정당하다.

실제 문제되는 것은 따로 있다. 감정적으로 불편하거나 물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의도적으로 잊으려하거나 더 나아가 경멸하는 것이야 말로 진짜 폭력일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세상을 변화 없는 정물로 만드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옛 것을 보낸다.”란 말에 의도적 망각 혹은 불편한 것에 대한 무시가 숨어 있지 않나 경계해야 한다. 잊어야 할 것이 있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망각이 폭력이 되지 않으려면 불편한 과거를 정리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과거는 현재를 지배한다. 때문에 시작은 운명적으로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린 깔끔한 시작을 원하지만 유령처럼 드리운 과거의 시간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다. 때문에 매듭을 지어야 한다. 씻김굿이 필요하다. 그것이 안 된다면 우린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 오히려 붙잡고 늘어져 연대해 해결해야 한다.

사람을 뜻하는 한자인 ‘人’은 연대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모름지기 사람은 서로 의지하고 살아야 한다. 서로 기대고 있는 모습은 아름답다. 연대와 공감은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귀중한 가치다. 우린 인간이기에 얼마든지 폭력을 최소화할 수 있다.

그 첫 번째 단추가 공감이다. 타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한없이 취약한 존재란 사실이 가슴을 울려야 한다. 그게 안 된다면 인간이 야수와 다른 점은 전혀 없다. 도로 위 노파, 지하철 계단의 노숙자, 굴뚝 위의 노동자, 바닷속의 실종자. 이들이 바로 ‘우리’라는 공감에 가슴이 아파올 때 비로소 우린 짐승이 아닌 인간이 될 수 있다.

청양의 해가 밝았다. 우린 오늘 새로운 시간의 마디에 서 있다. ‘시작’이란 단어는 언제 들어도 좋다. 희망이 담겨 있어서다. 지난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한다는 건 그래서 기분 좋은 설렘이다.

이제 출발해야 한다. 하나, 아픔에 떠는 그들 아니 우리를 남겨둔 채 섣불리 새로운 시작을 얘기할 수는 없다. 무시와 의도적 망각은 폭력이다. 이제 그 폭력을 줄여야 한다. 누군가가 떨고 있다면, 울고 있다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면 그 원인이 뭔지는 알려고 애써야 하는 거 아닌가.

우린 서로에게 ‘서로’여야 한다. 따뜻한 울림이어야 한다. 그래야 묵은 해를 진정으로 보낼 수 있다. 그래야만 신선하게 새 해를 맞을 수 있다.

<경제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