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달력이 한 장만 남았다. 2014년도 이렇게 저물어간다. 저물어가는 한해의 시간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남긴다. 돌아보면 올 한해는 분노와 불안의 나날로 기억될 것이다. 4월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가 분노를 안겨줬다면, 활력을 잃어가는 경제와 정치, 사회는 불안을 가중시켜 왔다.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이 비관적일 때 비관을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관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사회를 연구하는 나와 같은 이들에겐 매우 무거운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비관을 감추거나 외면해선 안 된다는 점이다. 비관을 과장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고, 또 구성하고 있는 사회에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를 올바로 인식할 때에만 제대로 된 해법을 찾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전적 의미에서 위기란 위험한 시기를 말한다. 그리고 위험은 해로움이나 손실이 생길 우려가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사회학에서 널리 알려진 위기에 대한 정의는 이탈리아 정치사상가인 안토니오 그람시에 의해 주어진 바 있다. 그람시는 과거의 것이 죽어 가는데 새로운 것은 나타나지 않는 상황을 위기로 이해했다.

그람시의 위기 개념은 우리 사회에서 이미 여러 사람들에 의해 쓰여 왔다. 전체 사회를 놓고 볼 때 그람시가 말하는 위기가 최근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시절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위기는 경제사회와 정치사회에서 모두 관찰된다. 경제사회의 위기는 다시 시장 안의 분배 위기와 시장 밖의 재분배 위기로 나눠 볼 수 있다. 갈수록 구조화되는 양극화가 분배 위기를 보여준다면, 제대로 보호 받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의 삶은 재분배 위기를 증거한다.

경제사회의 위기에 대한 시민사회의 대응은 2010년 희망버스 행진과 무상급식 논란으로 촉발된 복지국가 논쟁으로 나타났지만, 4년이 지난 현재 이러한 위기에 대처하는 국가의 역량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더욱이 최근 우리 경제가 ‘잃어버린 20년’으로 지칭되는 일본 경제와 유사해지는 경향을 드러냄으로써 소비를 포함한 국민 다수의 심리마저 크게 얼어붙고 있다.

정치사회의 위기는 대표성의 위기다. 선진화된 경제적·사회적 구조를 갖기 위해선 정치사회의 역할이 더없이 중요하다. 정부와 국회로 대변되는 정치사회는 새로운 규칙과 법률을 마련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오지 못했다.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구축이 경제사회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향이라면, 국민 다수가 이러한 방향에 동의한다면, 정치사회가 이러한 의사를 대변하고 대표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책무다. 하지만 정치사회는 이러한 의무를 다하지 못함으로써 불만과 불신, 때로는 환멸의 대상이 되고 있다.

경제와 정치의 이러한 이중적 위기는 시민사회의 활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지난 1987년 민주화 시대가 열린 이후 우리 사회의 발전을 이끌어온 원동력 가운데 하나는 공론장과 비정부조직(NGO)으로 대표되는 시민사회의 활력이었다. 우리나라가 아시아에서 민주화를 선도할 수 있었던 것도, 1997년 외환위기를 빠르게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활기찬 시민사회’에 있었다.

하지만 이 활기찬 시민사회도 정치적·경제적 위기가 맞물려 ‘불안의 시민사회’로 변화돼 왔다. 소수의 상층을 제외하고 다수의 계층과 세대에게 모두 자기 삶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우울한 전망을 안기는 이러한 불안은 불신을 가중시키고, 다시 예각적인 갈등으로 귀결되고 있다.

바로 이러한 풍경이 내가 품고 있는 비관의 실체다. 과연 어디서 새로운 낙관을 일궈내야 할까. 그 희망의 단서가 여전히 정치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새로운 규칙과 제도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선 정치가 자신에게 부여된 고유한 임무를 자각하고 성실히 수행하는 것 이외의 다른 방도를 찾기 어렵다.

그렇다. 문제는 여전히 정치다. 비관 속의 낙관을 모색할 수 있는 정치, 그런 희망의 정치, 자기 계몽의 정치를 여전히 기대하는 이들이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을 우리 정치사회는 정말 모르고 있는 걸까.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