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2년 11월 국회의사당과 총리 관저 등이 몰린 그리스 신타그마광장에서 한 노인이 머리에 권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 한 발은 그리스의 심장을 저격했다.

처음에는 경찰이 몰려들고, 응급차가 달려오고 군중이 몰려드는 여느 사고의 현장과 다름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자살한 노인의 품에서 유서가 발견되면서, 그리스 전역이 들끓기 시작했다. 전직 약사였던 노인의 유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평생에 걸쳐 성실하게 일해 왔다. 그리고 국가가 보증하는 연금을 납부했다. 하지만 조국은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조국이 나를 버렸기 때문에 나도 조국을 버린다.”

예산은 바닥난지 오래고 부채는 감당 할 수 없는 규모로 늘어 국가는 더 이상 약속된 연금을 지급할 수 없었다. 각종 연금은 최대 70%까지 삭감되었다. 자살한 노인은 평생 연금을 납부했고, 은퇴 후 그 연금으로 살아가는 연금 생활자였다.

하지만 계속되는 연금 삭감은 결국 연금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노인은 이에 항의하는 방식으로 권총자살을 선택한 것이다.

노인의 자살로 그리스에 전국적인 시위가 일어났다. 경제위기로 무기력해진 시민들의 분노가 노인의 죽음으로 폭발한 것이다. 그후 지금까지 그리스는 시위가 그치지 않고 곳곳에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나는 도시로 전락해버렸다. 재작년 그리스를 휩쓴 폭동의 시발점이었다.

그로인해 집권당이 물러나고 총선이 실시되고 정권이 바뀌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한 국가가 파산에 이르는 길은 여러가지다. 경제는 공공부분과 민간부분을 두 개의 축으로 삼는다. 민간이 침체되면 정부가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고, 정부가 어려움에 처하면 세금을 늘려 빈 곳간을 메우게 된다.

하지만 민간에 위기가 발생했을 때 국가에 재정을 투입할 재원이 부족하거나, 반대로 국가의 곳간이 비었을 때 민간이 세금을 부담할 능력이 없다면 국가 경제에 위기가 발생한다. 만약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진행되면 바로 국가 부도로 치닫게 된다.

현재의 그리스가 그렇다. 그리스는 광범위한 탈세와 무질서한 재정 지출로 인해 곳간이 텅텅 비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자치단체의 방만한 운영과 정부 조직의 비대는 재정 누수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민간 역시 마찬가지다. 섯부른 유로존 가입 후 값싼 금리의 독일계 자금을 빌려 대대적인 투기가 일어났고, 거품 붕괴와 함께 민간은 총체적 파산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국가는 그것을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무책임한 정치권과 만연한 포퓰리즘에 휘둘린 정부는 해결 능력을 상실해 버린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고 있었던 문제를 아무도 해결하려 들지 않고, 서로 미룬 탓이다. 정치인들은 정권을 잡기 위해 인기영합 정책만 남발할 뿐 아무도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려고 하지 않았다. 그 결과 곳간이 비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무원의 수는 매년 늘었고, 쌀 독의 쌀이 떨어질 때까지 파티를 계속했다.

대중은 그들대로 세금을 탈세하는 것이 마치 미덕인양 여겼다. 심지어 지식인들마저 “그리스는 독립 전 터키 지배 하에서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이 애국이었기 때문에, 그 문화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거나, “지방자치의 오랜 전통으로 인해 국세 납부에 저항감이 있다”는 얘기를 공공연하게 늘어놓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그리스 경제위기를 두고 손가락질하며 비웃는 우리는 과연 그와 다를까?. 우리나라 재정은 곳간이 든든하고, 경제는 성장하며 정치는 건강한 의사결정을 하고 있을까. 거기에 대한 답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연금 역시 마찬가지다. 이대로라면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공무원연금 뿐 아니라, 국민연금을 포함한 그 어떤 연금의 미래도 보장 할 수 없다. 하지만 20년 전의 그리스처럼 우리는 모두 본질을 외면하고 있다. 사회구조 개혁은 강요할 수도 외면 할 수도 없는 문제다.

모든 진실을 솔직히 이야기하고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하게 될까? 가을 서리만큼이나 서늘한 한기가 느껴지는 상상이다.

<지식나눔네트워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