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의창- '통일은 대박' 인가?
2014년 10월 17일(금) 00:00 가가
안경환의 '법과 문화'
“나에게 조국은 없다. 산하가 있을 뿐이다.” 한 시대를 호령했던 작가 이병주(1921∼1992)의 비장한 수사다.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보다는 한반도의 주민으로 살고 싶다.” 5.16 쿠데타를 ‘민족혁명’으로 포장한 ‘박정희의 장자방이자 정도전’이었던 황용주(1918∼2001)의 평생 염원이었다.
일제 말기의 지식청년들은 이민족에 빼앗겼다 되찾은 산하에 두 개의 조국이 들어서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철저한 반공국가 대한민국에서 두 사람이 국사범으로 옥고를 치른 것은 개인적 불운을 넘어 민족의 비극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변할 수밖에 없었다. 두 지식인의 때이른 주장대로 남북한은 1991년 유엔에 함께 가입하였다. 한반도에 두 개의 합법정부가 있음을 서로가 인정하고 세계가 이를 공인한 것이다. 실로 슬픈 일이다. 남은 과제는 행여 다시 하나 될 길은 없는가? 그게 요원하면 그때까지 어떻게 둘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까.
1978년 12월, 나는 태국의 수도 방콕에 있었다. 아시안게임 폐막일에 열린 축구 결승전을 관람한 것이다. 열전 끝에 남북한 공동 우승이라는 감격 어린 축제를 나눈 감회를 잊지 못한다. 당시는 축구 실력 뿐만 아니라 국력도 엇비슷한 두 나라였다. 북한사람들도 덜 경직되었고 터무니없는 생떼와 신경질도 덜 부렸다.
그로부터 36년, 안방에서 인천아시안게임을 관람했다. 그 시절과는 달리 인공기도, 북한 애국가도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제약 없이 접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남쪽이 붉은 색 유니폼을 입었다. 한때 그 색은 대한민국에서 불온의 상징이었다. 축구에서 남북의 남녀가 승리를 나누었다. 그러나 몇 종목을 제외하고는 두 나라는 스포츠나 국력에 있어 차원이 달라졌다.
폐막식에 북한 고위층 3인방이 벼락 참석했다. 이어서 남북 고위급회담이 열릴 것 같은 기대가 부풀더니만 다시 냉각기류가 엄습해 왔다. 일부 탈북자가 주도하는 민간단체가 북녘 땅을 향해 선전 전단을 날리자, 성난 북한군이 총질을 했다.
‘최고 존엄’ 지도자를 모욕하는 내용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북한 내의 인권문제도 국제정치의 장에 오르자 북한정권의 입지가 더욱 약화되었다. 남은 무기는 핵과 억지뿐일지도 모른다.
작가 이문열은 새로 펴낸 자전적 소설 ‘변경’에서 한반도를 아메리카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각축하는 변경으로 규정했다. 러시아가 물러간 그 자리에 전래의 종주국, 중국이 되돌아왔다. 애당초 우리 산하의 분단은 국제정세의 소산이듯이 재통일 또한 국제적 여건이 조성되지 않고서는 이루어 질 수 없다.
미국과 중국은 다투어 주도권을 행사하려 든다. 일본도 은근히 관심과 이해관계를 들이민다. 이런 틈바구니 속에서 남북이 주도하는 통일 담론체계의 구축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박근혜 정부는 ‘통일은 대박’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경박한 장사꾼의 심리가 내비치는 듯하여 기분이 개운치 않다. ‘로토 복권’ 당첨처럼, 마치 통일이 되면 일확천금이라도 생길 듯 투기 심리를 조장하는 느낌마저 든다. 북의 입장에서는 ‘북진통일’ ‘흡수통일’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남한의 통일원칙을 강요하는 듯한 위기감이 들지도 모른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그처럼 비장하게 목청 돋우어 통일 노래를 외치던 세대가 물러나고 있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이산가족’마저 사라지면, 더 이상 통일에 목을 맬 사람은 없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 통일은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성취해야 할 당위가 아니라, 이런 저런 전제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할 수도 있는 선택사항이 되어 버렸다. 합리적인 선택을 위해서는 서로 존중하는 자세로 진지하게 대화해야만 한다.
다행스럽게 박 대통령도 통일준비위원회의 회의석상에서 ‘전쟁 중에도 대화는 계속하는 법’이라며 꽉 막힌 ‘5.24 체제’를 타파할 여지를 남겨두었다. 그동안 강경일변도로 비치던 정부의 입장에 변화가 생긴 것일까? 그러기를 바란다.
통일은 길고도 힘든 과정이다. 만약 통일이 김기협의 ‘해방일기’ 구절처럼 어느 날 갑자기 ‘도둑처럼’ 찾아오게 되면 그야말로 난리다. 전쟁 또는 북한체제의 갑작스런 붕괴로 인한 통일은 안 하니만 못하다.
행여 로토 복권처럼 ’대박‘으로 얻은 통일이라면 수천 년 동안 벗어나지 못할 민족의 대재앙이 될 것이다. 끊임없는 대화, 교류, 평화의 연습 끝에 얻은 통일이라야 진정한 통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굳게 닫혀 있는 ‘남북의 창’이 활짝 열려야만 한다.
<서울대명예교수·전 국가인권위원장>
일제 말기의 지식청년들은 이민족에 빼앗겼다 되찾은 산하에 두 개의 조국이 들어서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철저한 반공국가 대한민국에서 두 사람이 국사범으로 옥고를 치른 것은 개인적 불운을 넘어 민족의 비극이었다.
1978년 12월, 나는 태국의 수도 방콕에 있었다. 아시안게임 폐막일에 열린 축구 결승전을 관람한 것이다. 열전 끝에 남북한 공동 우승이라는 감격 어린 축제를 나눈 감회를 잊지 못한다. 당시는 축구 실력 뿐만 아니라 국력도 엇비슷한 두 나라였다. 북한사람들도 덜 경직되었고 터무니없는 생떼와 신경질도 덜 부렸다.
‘최고 존엄’ 지도자를 모욕하는 내용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북한 내의 인권문제도 국제정치의 장에 오르자 북한정권의 입지가 더욱 약화되었다. 남은 무기는 핵과 억지뿐일지도 모른다.
작가 이문열은 새로 펴낸 자전적 소설 ‘변경’에서 한반도를 아메리카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각축하는 변경으로 규정했다. 러시아가 물러간 그 자리에 전래의 종주국, 중국이 되돌아왔다. 애당초 우리 산하의 분단은 국제정세의 소산이듯이 재통일 또한 국제적 여건이 조성되지 않고서는 이루어 질 수 없다.
미국과 중국은 다투어 주도권을 행사하려 든다. 일본도 은근히 관심과 이해관계를 들이민다. 이런 틈바구니 속에서 남북이 주도하는 통일 담론체계의 구축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박근혜 정부는 ‘통일은 대박’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경박한 장사꾼의 심리가 내비치는 듯하여 기분이 개운치 않다. ‘로토 복권’ 당첨처럼, 마치 통일이 되면 일확천금이라도 생길 듯 투기 심리를 조장하는 느낌마저 든다. 북의 입장에서는 ‘북진통일’ ‘흡수통일’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남한의 통일원칙을 강요하는 듯한 위기감이 들지도 모른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그처럼 비장하게 목청 돋우어 통일 노래를 외치던 세대가 물러나고 있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이산가족’마저 사라지면, 더 이상 통일에 목을 맬 사람은 없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 통일은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성취해야 할 당위가 아니라, 이런 저런 전제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할 수도 있는 선택사항이 되어 버렸다. 합리적인 선택을 위해서는 서로 존중하는 자세로 진지하게 대화해야만 한다.
다행스럽게 박 대통령도 통일준비위원회의 회의석상에서 ‘전쟁 중에도 대화는 계속하는 법’이라며 꽉 막힌 ‘5.24 체제’를 타파할 여지를 남겨두었다. 그동안 강경일변도로 비치던 정부의 입장에 변화가 생긴 것일까? 그러기를 바란다.
통일은 길고도 힘든 과정이다. 만약 통일이 김기협의 ‘해방일기’ 구절처럼 어느 날 갑자기 ‘도둑처럼’ 찾아오게 되면 그야말로 난리다. 전쟁 또는 북한체제의 갑작스런 붕괴로 인한 통일은 안 하니만 못하다.
행여 로토 복권처럼 ’대박‘으로 얻은 통일이라면 수천 년 동안 벗어나지 못할 민족의 대재앙이 될 것이다. 끊임없는 대화, 교류, 평화의 연습 끝에 얻은 통일이라야 진정한 통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굳게 닫혀 있는 ‘남북의 창’이 활짝 열려야만 한다.
<서울대명예교수·전 국가인권위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