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지리산에 갔다 왔다. ‘지리산 프로젝트 2014: 우주·예술·집’이 마련한 학술대회에서 발표를 하기 위해서였다. 남원 실상사에 들러 전시를 보고 산청 성심원에 가서 발표를 했는데, 남원에서 함양을 거쳐 산청으로 가면서 바라본 지리산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장엄했다.

어릴 적엔 산이 왜 좋은지 잘 몰랐다. 우리나라와 자연 조건이 다른 독일에서 5년 공부하고 미국에서 2년 연구하는 동안 우리 산야의 아름다움을 생각해보게 됐다. 특히 지리산을 포함한 우리 산들은 자연에 대한 많은 것들을 돌아보게 하고 깨닫게 했다.

지리산은 한반도 남쪽에서 가장 높은 산이자 넓은 산이다. 백두산에서 시작하는 백두대간의 종착지이자, 최근엔 설악산으로 향하는 백두대간 산행의 출발지이기도 하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의 국경이었고, 통일신라시대에는 구례 화엄사가 보여주듯 귀족적인 교종의 거점이자, 남원 실상사와 곡성 태안사가 보여주듯 민중적인 선종의 무대였다. 고려시대에는 민란과 왜구 침략의 역사적 현장이기도 했다.

지리산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 그 의미가 더욱 커졌다. 지리산 동쪽 산청에 은거한 남명 조식과 지리산 서쪽 구례에서 1910년 순국한 매천 황현은 특히 잊을 수 없는 이들이다.

“그것이 어찌 지리산만 하겠소. 하늘이 울어도 울리지 않는다오”라고 지리산과 같은 굳은 의지를 소망한 조식으로부터 지식인의 태도를 배우게 됐고,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옛일을 돌이켜보니, 문자 안다는 사람 인간되기 어렵구나”라는 절명시를 남긴 황현으로부터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를 돌아보게 됐다.

해방 이후 지리산은 한국전쟁의 비극적 현장이었다. 또, 지리산의 동과 서는 지역주의로 나뉘게 됐다. 이런 지리산을 최근 다시 발견하게 한 것은 지리산 둘레길이다. 지리산 둘레길은 문명화된 ‘도로’를 거부하고 자연 속의 ‘길’을 걷게 함으로써 길과 자연, 삶과 사회를 새롭게 성찰하게 한다.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 것은 초전박살, 속전속결, 일망타진으로 특징 지어지는 압축 성장에 대한 반성의 의미를 품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강제하는 속도의 숭앙에 대한 적극적 거부, 지나친 경쟁의 논리에 대한 방어적 거부가 둘레길 걷기 열풍에 담긴 문화적 코드다.

이렇듯 지리산은 여러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역사로서의 지리산은 민족을 발견하게 하고, 정치로서의 지리산은 상생을 발견하게 하며, 사회로서의 지리산은 길과 삶을 발견하게 한다. 바로 이런 민족, 상생, 길과 삶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가치는 다름 아닌 ‘생명’, 죽임이 아닌 ‘살림’이다.

지리산에 오면 지리산이 우리에게 거는 말은 바로 생명의 삶, 생명의 사회를 열어가라는 ‘살림의 재발견’이리라. 그리고 이 살림에는, 인간이든 자연이든 생명을 최우선으로 하는 ‘살림’, 국민 다수의 가계 및 생활을 해결할 수 있는 ‘살림’, 사회를 둘로 나누는 분열을 넘어서는 통합으로서의 ‘살림’이라는 세 겹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생명과 살림에는 중심과 주변이 없다는 점이다. 모든 생명들은 저마다 고유한 가치를 갖는다. 그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고, 같음과 연대를 추구하는 게 생명의 윤리이자 살림의 철학이다.

봉우리와 계곡, 산길과 들길, 실상사의 불교와 성심원의 천주교가 공존하는 곳이 지리산이다. 천왕봉만이 지리산의 주인공이 아니다. 남원, 장수, 구례, 곡성, 함양, 산청, 하동에서 만나게 되는 산과 물, 나무와 숲, 사람과 마을 모두가 지리산의 주인들이다.

누구나 경험하듯 지리산을 찾았을 때와 떠날 때의 마음이 달라지는 이유는 지리산에 담긴 생명과 살림의 의미를 의식적·무의식적으로 깨닫는 데 있을 것이다.

‘지리산 프로젝트 2014’는 11월 2일까지 남원 실상사, 산청 성심원, 하동 삼화에코하우스 등에서 다양한 공공예술을 펼쳐 보인다. 지난 주에 보니 초록의 지리산은 서서히 단풍의 지리산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남원에서 임천강과 경호강을 따라 산청으로 오는데 지리산은 내게 산처럼, 물처럼 살아가라고 말을 건네고 있었다.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