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펠레폰네소스 반도에 ‘미스트라’라는 고대도시가 있다. 당시 왕이었던 콘스탄티누스 11세가 터키의 공세로 쓰러져가는 형제국 ‘비잔틴제국’을 지키기 위해 이곳을 떠나게 된다. 비잔틴의 마지막 황제가 된 그는 전쟁터에서 장렬히 전사한 뒤 미스트라는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가 되었다.

하지만, 그 덕에 이곳에는 비잔틴 전성기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터키 지배를 거치며 아야 소피아를 비롯한 이스탄불의 성당들은 대개 모스크로 바뀌거나 많은 손상을 입었지만, 이곳은 폐허가 된 탓에 비잔틴 절정기의 건축과 벽화가 보존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석굴암의 불상처럼 오랫동안 방치된 탓에 프레스코 벽화에 이끼가 끼고 곳곳이 붕괴되긴 했지만, 장기간의 보수 끝에 지금은 원형을 거의 되찾아 많은 관광객의 발길이 모이고 있다.

그런데 미스트라의 주요 수도원 중의 하나인 성모 성당의 한쪽 벽에는 비잔틴 당시의 벽화 대신 근대에 그려진 듯한 인상적인 벽화가 한 점 그려져 있다. 수백 년 된 성화들 틈에 선명한 색채로 그려진 이 그림은 중세의 장인들이 그린 장엄한 성화들과 비교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은 높은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많은 이들이 작가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곤 하는 이유다.

이 그림을 그린 작가는 미스트라 복원작업에 참여했던 그리스 민중화가로, 부분 훼손된 다른 쪽 벽과는 달리 심하게 손상된 동쪽벽을 복원할 방법이 없자, 직접 자신의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훌륭한 작가의 다른 작품을 감상할 방법은 없다. 그가 그린 다른 작품들은 그리스 독립전쟁 중에 모두 소실되었고, 남아있는 작품은 이곳 미스트라의 벽에 그려진 벽화와 아테네 시청청사에 그려진 벽화 단 두 점 뿐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작품을 보기 위해 출국 당일 그리스 시청을 방문했다. 하지만, 도착한 시간은 오후 세시 반, 이미 시청 문이 닫힌 시간이었다. 내심 불가능하리라 생각하며 경비원에게 내부의 벽화를 잠시 볼 수 없겠느냐고 물었더니, 놀랍게도 불 꺼진 청사 내부를 지나 2층 시장 부속실로 안내했다.

목적을 묻는 부속실 담당자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나는 한국인 관광객인데 오늘 오후 출국예정이라, 드미트리우스가 그린 벽화를 지금이라도 볼 수 없을까 해서 이렇게 찾아왔다.” 설명을 들은 담당자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미안하다. 지금 보여줄 수는 있지만, 그 벽화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는 직원이 이미 퇴근을 해버렸다.” 안내받는 호사는 고사하고 지금 당장 볼 수 있다는 기대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담당자가 안내한 곳은 놀랍게도 시장 집무실이었다. 그녀는 경비원까지 불러 잠겨진 시장실 문을 연 다음, 시장실 안으로 필자를 안내했다. 벽화는 시장의 집무용 책상 뒷벽에 장엄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스스로 전문가가 아니라고 말하는 그녀의 간략한 설명을 들으며 벽화를 감상하고 사진까지 촬영한 다음 물었다. “당신의 친절에 놀랐다. 외국인 관광객이 시장실에 걸린 벽화를 보고 싶다고 해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가? 아무리 관광대국이라지만 이것은 너무 놀라운 친절이다.”

그녀의 대답은 이랬다. “이 작품은 우리 그리스의 유산일 뿐 아니라 세계인의 유산이다. 그 누구도 독점할 수 없으며 누구든 같이 감상할 권리가 있다.” 예상 외의 답변에 놀라 다시 반문했다. “그럼 많은 관광객이 나처럼 벽화를 보러온다면 시장이 일을 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러자 놀라운 답이 돌아왔다. “벽화를 보려는 사람이 많아 업무에 방해가 된다면, 시장실을 다른 데로 옮기면 된다.”

정말 놀라운 발상이었다. 만약 서울시장 실에 걸린 그림을 보기 위해 배낭을 멘 관광객 한 명이 퇴근시간 후에 찾아와 “그림을 보고 싶다.”라고 한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우리는 늘 사람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시장실을 옮기면 된다.”라는 그 당연한 답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순간이 과연 우리에게도 찾아올까? 만약 그렇지못하다면 민주주의의 발상지 아테네인들의 태도를 차라리 비효율이라고 경멸해야 하는 것일까? 답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지식나눔네트워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