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의 법과 문화 ] 광주 1980, 진도 2014, ‘세월’ 너머로
2014년 05월 02일(금) 00:00 가가
1980년 5월, 그 비극의 계절에 내 몸은 외국 땅에 있었다. 민주주의와 법을 공부한답시고 늦깎이 학생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해 내내 광주의 참극은 세계의 관심사였다. 미국과 유럽의 여러 대학 캠퍼스에서 참혹한 현장을 담은 영상이 상연되었다.
시민을 향해 무차별 총질을 해대는 내 나라 군인들의 모습은 실로 충격이었다. 역사가 긴 문화민족이라는 일말의 자부심마저 무참히 꺾인 치욕이었다. 그해 말, 시사 잡지 ‘타임’과 ‘뉴스위크’가 선정한 한 해의 세계 10대 ‘비인간적’ 사건의 목록 2위로 올랐다. 미국정부가 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기에 미국언론이 집중 조명한 남아메리카의 엘살바도르의 학살이 1위였다.
그해 12월 크리스마스 이브, 파리 노트르담 사원에서 포크 스타의 축제가 열렸다. ‘솔밭 사이로 시냇물은 흐르고’라는 노래로 우리 세대 한국인의 귀에도 익숙했던 미성의 반전가수, 조안 바에스가 광주의 희생자에게 노래를 헌정했다.
2014년 4월, 진도 앞바다에서 제주행 정기선이 침몰했다. 대형 선박사고야 다른 나라에서도 더러 있는 일이지만 이렇듯 ‘비정상적인’ 사건은 없다. 적어도 OECD국가에서는 말이다. 모르면 모르되 금년 말 세계 ‘비정상’ 사고의 상위 랭킹은 따 논 당상이다.
“한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외국인들의 탄성이다. 하루에도 몇 통씩 위로의 전갈이 날아든다. 고맙지만 부끄럽다. 34년 전 5·18의 참상이 몇 배가 되어 몰려든다. 왜 고난의 뱃길이 하필이면 이 아름다운 평화의 고장, 남도 땅에서 고장을 일으킨 것일까? 땅길 뿐 아니라 물길마저도 차별받는 것일까?
“저주 받은 땅 내 고향 하와이, 나는 이곳에 수갑 찬 몸으로 왔다.” 온 천지가 꽁꽁 얼어붙은 동토(凍土)였던 ‘겨울공화국, 그 시절의 보통명사였던 ‘오적시인’ 김지하의 비장한 수사가 되살아난다.
천재지변도 아니다. 어김없는 인재(人災)다. 단순한 한 건의 인재가 아니다. 이게 바로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겉치레만 번드르르한 나라, 급조된 ‘건설공화국’의 진면목이다. 외형적 성장, 물질적 부의 축적에만 혈안이 되어 인간의 생명과 안전, 자연과 환경, 사람다운 삶을 뒷전으로 팽개쳐 온 천민자본주의의 치부가 고스란히 드러난 사건이다.
1년 전 출범하면서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개명한 새 정부다. 그런데 바로 한 달 전에 대통령은 친기업 이념을 천명하면서 ‘규제’를 암 덩어리에 비유했다. 시민의 안전에 관련된 정부의 책임 수행은 절대 규제가 아니다. 정당한 규제를 핑계로 부패와 탈선으로 방기한 ‘관피아’도 책임이 크다.
안전보다 이윤에 눈독이 든 기업이야 새삼 말해 무삼하리오! 돈이면 하느님도 산다는데 말이다! 법 제도와 관행도 문제다. 그러나 정부나 기업, 그리고 법만의 문제도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 국민 모두의 잘못이다. 오래전에 한국 국민은 고질적인 안전불감증 환자라는 국제사회의 진단이 내려져 있다.
안전한 일상을 그토록 열망하면서도 정작 스스로 위험에 내다 맡긴 우리가 아닌가. 한 예로, 다수의 국민이 자동차 운전 중에 휴대폰을 상용하는 나라가 아닌가? 선진국에서는 미치광이, 마약중독자나 하는, 그야말로 ‘비정상’인 짓거리를 말이다.
광주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실로 멀고 험한 길을 넘어 왔다. 은폐되었던 진실을 밝혔고, 잔혹한 책임자를 처벌하였고, 억울한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해주었고 보상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의가 구현된 것은 아니다. 진정한 치유와 정의는 다시는 그런 비인간적인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데 있다.
‘세월호’ 사건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비상식’ ‘비정상’인 일이 어찌 가라앉은 선박 하나 뿐이겠는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정부도, 관리도, 기업도, 시민도 모두가 함께 각성하자.
대한민국은 아직도 갈 길이 멀고도 멀다. 그러나 아주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다. 책임을 져야할 선장과 선원은 승객을 버렸지만 마지막까지 의로운 일에 몸을 바친 시민도 많았다. 우리가 ‘의인’이라 부르는 분들의 고귀한 행위도 실은 선진국에서는 지극히 상식적인 시민의 일상적인 미덕에 불과하다.
가진 자, 책임 있는 자, 오래 산 자가 약한 자, 보호 받는 자, 오래 살 자를 챙기고 보살피는 것은 민주시민의 기본 덕목이다. 광주를 이겨냈듯이 진도도 품고 ‘세월’ 너머로 가자. 우리 모두 자신이 선 곳을 살펴보자. 내 가족은, 이웃은, 나라는, 세상은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가, 숙고해 보자.
좀 덜 벌어도, 덜 허우적거리며 평화롭고 안전하게, 그리고 서로 존중하며 사는 것, 그것이 우리 모두의 염원이다.
<서울대 명예교수·전 국가인권위원장>
시민을 향해 무차별 총질을 해대는 내 나라 군인들의 모습은 실로 충격이었다. 역사가 긴 문화민족이라는 일말의 자부심마저 무참히 꺾인 치욕이었다. 그해 말, 시사 잡지 ‘타임’과 ‘뉴스위크’가 선정한 한 해의 세계 10대 ‘비인간적’ 사건의 목록 2위로 올랐다. 미국정부가 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기에 미국언론이 집중 조명한 남아메리카의 엘살바도르의 학살이 1위였다.
2014년 4월, 진도 앞바다에서 제주행 정기선이 침몰했다. 대형 선박사고야 다른 나라에서도 더러 있는 일이지만 이렇듯 ‘비정상적인’ 사건은 없다. 적어도 OECD국가에서는 말이다. 모르면 모르되 금년 말 세계 ‘비정상’ 사고의 상위 랭킹은 따 논 당상이다.
천재지변도 아니다. 어김없는 인재(人災)다. 단순한 한 건의 인재가 아니다. 이게 바로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겉치레만 번드르르한 나라, 급조된 ‘건설공화국’의 진면목이다. 외형적 성장, 물질적 부의 축적에만 혈안이 되어 인간의 생명과 안전, 자연과 환경, 사람다운 삶을 뒷전으로 팽개쳐 온 천민자본주의의 치부가 고스란히 드러난 사건이다.
1년 전 출범하면서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개명한 새 정부다. 그런데 바로 한 달 전에 대통령은 친기업 이념을 천명하면서 ‘규제’를 암 덩어리에 비유했다. 시민의 안전에 관련된 정부의 책임 수행은 절대 규제가 아니다. 정당한 규제를 핑계로 부패와 탈선으로 방기한 ‘관피아’도 책임이 크다.
안전보다 이윤에 눈독이 든 기업이야 새삼 말해 무삼하리오! 돈이면 하느님도 산다는데 말이다! 법 제도와 관행도 문제다. 그러나 정부나 기업, 그리고 법만의 문제도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 국민 모두의 잘못이다. 오래전에 한국 국민은 고질적인 안전불감증 환자라는 국제사회의 진단이 내려져 있다.
안전한 일상을 그토록 열망하면서도 정작 스스로 위험에 내다 맡긴 우리가 아닌가. 한 예로, 다수의 국민이 자동차 운전 중에 휴대폰을 상용하는 나라가 아닌가? 선진국에서는 미치광이, 마약중독자나 하는, 그야말로 ‘비정상’인 짓거리를 말이다.
광주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실로 멀고 험한 길을 넘어 왔다. 은폐되었던 진실을 밝혔고, 잔혹한 책임자를 처벌하였고, 억울한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해주었고 보상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의가 구현된 것은 아니다. 진정한 치유와 정의는 다시는 그런 비인간적인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데 있다.
‘세월호’ 사건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비상식’ ‘비정상’인 일이 어찌 가라앉은 선박 하나 뿐이겠는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정부도, 관리도, 기업도, 시민도 모두가 함께 각성하자.
대한민국은 아직도 갈 길이 멀고도 멀다. 그러나 아주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다. 책임을 져야할 선장과 선원은 승객을 버렸지만 마지막까지 의로운 일에 몸을 바친 시민도 많았다. 우리가 ‘의인’이라 부르는 분들의 고귀한 행위도 실은 선진국에서는 지극히 상식적인 시민의 일상적인 미덕에 불과하다.
가진 자, 책임 있는 자, 오래 산 자가 약한 자, 보호 받는 자, 오래 살 자를 챙기고 보살피는 것은 민주시민의 기본 덕목이다. 광주를 이겨냈듯이 진도도 품고 ‘세월’ 너머로 가자. 우리 모두 자신이 선 곳을 살펴보자. 내 가족은, 이웃은, 나라는, 세상은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가, 숙고해 보자.
좀 덜 벌어도, 덜 허우적거리며 평화롭고 안전하게, 그리고 서로 존중하며 사는 것, 그것이 우리 모두의 염원이다.
<서울대 명예교수·전 국가인권위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