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별아의 문학과 삶] 할아버지의 육아일기
2014년 03월 28일(금) 00:00 가가
외출하러 나선 길에 15층에서 엘리베이터를 잡으니 18층 꼬마가 먼저 타고 있다. 아직 걸음마가 위태로운 돌잡이, 그가 자가용 삼아 타고 있는 유모차의 운전수는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이시다.
“손자랑 함께 산책 나가시나 봐요.”
“이제는 집 안에서 노는 게 답답한지 자꾸 나가자고 조르네요.”
지난겨울을 보내며 아이는 콩나물처럼 불쑥 자랐다. 얼마 전까지 영락없는 젖먹이였는데 이제 제법 말귀를 알아듣는 기색이다. 저를 두고 이야기하는 걸 눈치 챘는지 또록또록한 눈망울로 할아버지와 나를 번갈아 쳐다본다. 할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에 함박웃음이 번진다.
요즘은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서 손주를 데리고 나온 조부모를 만나는 일이 어렵지 않다. 맞벌이 가정이 늘다 보니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엄마 아빠를 대신해 양육자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혼이나 취업 등으로 조부모가 부모를 대신하는 조손가정 또한 늘어나는 형편이다.
젊은 엄마들의 표현으로 ‘육아 실미도’라 불릴 정도로 아이 돌보기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단한 일이다. 옛말에도 밭을 매러 갈래, 애를 볼래 물으면 차라리 밭을 매러 가는 편이 낫다지 않은가? 아무래도 체력적으로 힘에 부칠 게 분명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손주들과 씨름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불가피한 현실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조부모가 손주를 양육하는 것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다. 소설가 조정래 선생은 손자라는 존재에 대해 “황혼의 인생을 맞은 사람들에게 하늘이 내려준 마지막 선물”이라고 표현했다.
우리 부모님만 보더라도 하나밖에 없는 손자를 그야말로 금지옥엽으로 받든다. 전화 통화라도 할라치면 정작 딸인 나와는 건성으로 몇 마디 나누다가 금세 “혜준이 좀 바꿔 봐라” 하신다. 손자가 받으면 수화기 바깥으로까지 즐거운 탄성이 들린다. 자식보다 손주에게 더 너그러운 까닭이 자식들과 달리 손주들에게는 책임과 의무가 없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조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손주들에게 따뜻한 추억으로 남는다.
세상이 아무리 변했다 해도 사람살이의 본질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조광조의 제자로 기묘사화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오랫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묵재 이문건이 쓴 ‘양아록(養兒綠)’을 읽으면 손자에 대한 사랑으로 절절매는 조선 사대부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문건은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불운하여 생전에 친자식들을 모두 앞세웠다. 하지만 고통스럽고 외로웠던 이문건에게 유일한 희망이요 사랑이 있었으니, 맏아들 온이 남긴 손자 숙길(후일 수봉으로 이름 바꿈)이었다. 이문건은 58세에 얻은 손자를 그야말로 지극정성으로 기르며 16년 동안 조선 최초의 육아일기인 양아록을 썼다.
‘4개월이 되니 들춰 안아도 되고/ 고개를 제법 가누어 잡아주지 않아도 되네/ 6개월이 되어 앉아 있기도 하는데/ 아침저녁으로 점점 달라져 가는구나.’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라고 했던가, 핏덩어리 때부터 직접 기른 정으로 이문건은 손자가 사랑옵아 어쩔 줄 모른다.
하지만 아이는 태어나서 여섯 살 때까지 평생 할 효도를 다한다고 했던가, 병치레나 없으면 다행이다 싶었던 손자가 말이 트이고 머리가 굵어가면서 슬슬 속을 썩이기 시작한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바란 것은 인륜을 어기지 않는 사람이 되라는 것, 임금을 도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치는 어진 신하가 되라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일단 과거에서 급제를 해야 할 텐데…. 할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숙길은 공부보다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싸움질과 술 마시기에 더 흥미가 있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눈을 부릅뜨고 욕을 하는 손자가 술이 깨길 기다려 온 가족이 두들겨 패는 장면에서는 사춘기의 아들 녀석이 부렸던 작패가 생각나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자식이 부모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결국 이문건은 손자가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장가를 가는 것도, 등과하는 것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정성과 사랑은 끝내 말썽쟁이 손자를 임진왜란의 의병장으로 곧추세운다. 때로 기대만큼 실망으로 안타까웠던 할아버지의 소원이 뒤늦게라도 꽃을 피운 것이다.
‘커가는 손자 지켜보는 일 즐거워/ 내 자신 늙는 줄도 모르겠네…나를 향해 두 손 들고/ 웃으며 다가오는데 미끄러질까 겁내는 듯도 하구나/ 등을 어루만지고 다시 뺨을 비벼주며/우리 숙길이 하며 끌어안고 환호하네.’
오백여 년 전 선비의 육아일기 양아록 속의 할아버지가 손주의 유모차를 끌고 봄날을 걷는 18층 할아버지의 모습에 겹친다. 사랑은 그처럼 시간에서 시간으로 이어진다.
<소설가>
“손자랑 함께 산책 나가시나 봐요.”
“이제는 집 안에서 노는 게 답답한지 자꾸 나가자고 조르네요.”
지난겨울을 보내며 아이는 콩나물처럼 불쑥 자랐다. 얼마 전까지 영락없는 젖먹이였는데 이제 제법 말귀를 알아듣는 기색이다. 저를 두고 이야기하는 걸 눈치 챘는지 또록또록한 눈망울로 할아버지와 나를 번갈아 쳐다본다. 할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에 함박웃음이 번진다.
젊은 엄마들의 표현으로 ‘육아 실미도’라 불릴 정도로 아이 돌보기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단한 일이다. 옛말에도 밭을 매러 갈래, 애를 볼래 물으면 차라리 밭을 매러 가는 편이 낫다지 않은가? 아무래도 체력적으로 힘에 부칠 게 분명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손주들과 씨름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세상이 아무리 변했다 해도 사람살이의 본질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조광조의 제자로 기묘사화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오랫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묵재 이문건이 쓴 ‘양아록(養兒綠)’을 읽으면 손자에 대한 사랑으로 절절매는 조선 사대부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문건은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불운하여 생전에 친자식들을 모두 앞세웠다. 하지만 고통스럽고 외로웠던 이문건에게 유일한 희망이요 사랑이 있었으니, 맏아들 온이 남긴 손자 숙길(후일 수봉으로 이름 바꿈)이었다. 이문건은 58세에 얻은 손자를 그야말로 지극정성으로 기르며 16년 동안 조선 최초의 육아일기인 양아록을 썼다.
‘4개월이 되니 들춰 안아도 되고/ 고개를 제법 가누어 잡아주지 않아도 되네/ 6개월이 되어 앉아 있기도 하는데/ 아침저녁으로 점점 달라져 가는구나.’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라고 했던가, 핏덩어리 때부터 직접 기른 정으로 이문건은 손자가 사랑옵아 어쩔 줄 모른다.
하지만 아이는 태어나서 여섯 살 때까지 평생 할 효도를 다한다고 했던가, 병치레나 없으면 다행이다 싶었던 손자가 말이 트이고 머리가 굵어가면서 슬슬 속을 썩이기 시작한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바란 것은 인륜을 어기지 않는 사람이 되라는 것, 임금을 도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치는 어진 신하가 되라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일단 과거에서 급제를 해야 할 텐데…. 할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숙길은 공부보다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싸움질과 술 마시기에 더 흥미가 있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눈을 부릅뜨고 욕을 하는 손자가 술이 깨길 기다려 온 가족이 두들겨 패는 장면에서는 사춘기의 아들 녀석이 부렸던 작패가 생각나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자식이 부모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결국 이문건은 손자가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장가를 가는 것도, 등과하는 것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정성과 사랑은 끝내 말썽쟁이 손자를 임진왜란의 의병장으로 곧추세운다. 때로 기대만큼 실망으로 안타까웠던 할아버지의 소원이 뒤늦게라도 꽃을 피운 것이다.
‘커가는 손자 지켜보는 일 즐거워/ 내 자신 늙는 줄도 모르겠네…나를 향해 두 손 들고/ 웃으며 다가오는데 미끄러질까 겁내는 듯도 하구나/ 등을 어루만지고 다시 뺨을 비벼주며/우리 숙길이 하며 끌어안고 환호하네.’
오백여 년 전 선비의 육아일기 양아록 속의 할아버지가 손주의 유모차를 끌고 봄날을 걷는 18층 할아버지의 모습에 겹친다. 사랑은 그처럼 시간에서 시간으로 이어진다.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