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웅의 영혼도서관] 인간주의 깃발을 올리자
2013년 11월 15일(금) 00:00 가가
작년 이맘때 나는 독일 바이에른 지방을 대표하는 역사도시 뉘른베르크에 잠시 머물고 있었다. 1945년 국제군사재판(國際軍事裁判)이 열렸던 곳. 나는 방황하듯 이 도시의 곳곳을 헤매었다. 독일의 가을 새벽은 차갑고 무거웠지만 도처에서 만나는 가슴은 충만했다. 한반도의 분단현실과 깊은 관계의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격했던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군은 나치의 전쟁범죄를 역사 앞에서 단죄한다는 명분 아래, 가장 정의롭고 공정하며 무엇보다도 냉철한 이성이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진지한 숙의 끝에 뉘른베르크 제원칙(諸原則)을 수립하고, 이를 국제연합총회에 의해 확인하는 쾌거를 이끌어낸다.
이 역사적 전범재판은 인류에게 커다란 교훈 그리고 평화를 지향하는 인간주의(人間主義)의 깃발로서 역사 앞에 지금까지 나부끼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2차대전을 거치면서 나치라고 하는, 끔찍한 폭력과 야만을 청산하는 과정 하나하나를 냉엄한 ‘원칙과 이성’으로 처리했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은 분단의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큰 배움이 아닐 수 없었다. 뉘른베르크의 유무형의 유산들은 그 자체로서 거대한 인류 문화유산이 되고 있다.
범게르만 운동의 본거지이기도 했던 뉘른베르크는 이 운동이 나치즘으로 왜곡 발전하면서 전범자(戰犯者)의 본거지를 이루었다. 학살 만행에 이르게 되는 역사의 현장임을 감안할 때, 이 도시의 도서관과 박물관은 차치하고, 산재한 많은 건축물들은 2차대전 이후의 근대문화재로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슈페어의 나치 전당대회 사열 무대장과 건축가 루드비히와 프란츠 루프의 오만 명 수용의 대 의사당은 로마 콜로세움을 흉내 내어 설계돼 결국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데, 승전 연합군에 의해 파괴되지 않고 남겨졌다. 그 구조물의 일부에 독일 제삼제국의 잘못된 역사를 비판 반성하고 불행했던 역사의 기억을 재현한 도큐멘테이션 센터를 건축적 패러디의 방식을 빌어 세워 놓고 있었다. 놀라운 유산으로 재현해 놓는 지혜를 바라보면서, 경복궁 경내에 있다가 헐려진 조선총독부 건물을 다시금 상기하게 되었다. 잘못된 역사의 유물을 부정의 방식이 아닌 긍정의 방식으로 패러디해 낸 오스트리아 건축가 귄터 도메니히의 솜씨가 부럽고 또 놀랍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숙소로 돌아온 나는 조용한 호텔방에서 숙제처럼 밀어 놓았던 유홍준이 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곱 번째 책의 서평을 쓰기 위해 노트북을 켰다. 역사의 현장에서 이곳의 문화유산과 우리의 그것을 비교하면서 글을 쓰고 싶었다.
몇 년 전인가,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로 많이 알려진 일본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와 오찬을 나누는 기회가 있었다. 그는 당시에 격심했던 중동전의 현장을 중계하듯 보도하는 CNN 뉴스를 보면서 몽블랑 만년필로 원고지에다 로마시대의 이야기를 손으로 쓴다고 말했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면서 글을 쓴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상상력 훈련임을 이 직업 문필가의 말씀에서 크게 감명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2008년 2월 10일, 한 부랑인의 방화로 숭례문(崇禮門)은 온 국민이 바라보는 앞에서 불타 참담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다섯 해 만인 올해에 많은 국가 예산과 온 국민의 정성 속에서 복원공사를 끝내고, 불난 일이 마치 전화위복인 양 당당하게 우리 앞에 다시 모셔진 국보일호를 칭송하면서 축하행사를 벌였다. 바로 몇 개월 전의 일이었다. 복원공사가 진행되던 지난 다섯 해 동안 우리는 마치 이 세상에서 문화재를 가장 아끼고 갈무리 잘하는 문화재 일등국민이 된 듯, 온갖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데 복원 숭례문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다시금 우리 앞에 추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우리나라 문화재 복원의 일류 전문가들이 총동원된 이 복원사업이 아예 수포로 돌아간 듯싶다.
우리 문화재의 현실은 뜻있는 이들에 의해 그동안 끊임없이 위기가 경고되 왔다. 문화재를 다루거나 현장을 지키는 거의 대부분의 조건들이 숭례문 사태를 예고하는 현장임을 알아야 한다. 많은 문화재들이 이미 손상되었거나 손상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기록문화재는 상거래에 맡겨져 방치돼 있거나, 최근에 완간을 본 ‘우현 고유섭전집(又玄 高裕燮全集)’처럼 사립 출판사가 심혈을 기울여 정리하지 않았다면 문화재로서 영원히 존재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놀라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 문화유산 답사기’ 서평을 쓰면서, 그 답사기에 앞서 1982년 한창기 님에 의해 뿌리깊은 나무에서 간행된 열 권짜리 ‘한국의 발견’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문화에 관해 폭넓은 시야와 유존의 방식을 제시했고 이를 실천했던 한창기! 그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는 그 책머리에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를 편찬한 외로운 선구자 고산자(古山子) 님께 바친다는 헌사(獻辭)가 있어 매우 뜻깊게 하고 있다.
고산자나 한창기처럼 인간주의의 깃발을 드는 국민이 많지 않은 한 우리 문화재의 현실은 밝을 수가 없다.
〈열화당 대표〉
몇 년 전인가,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로 많이 알려진 일본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와 오찬을 나누는 기회가 있었다. 그는 당시에 격심했던 중동전의 현장을 중계하듯 보도하는 CNN 뉴스를 보면서 몽블랑 만년필로 원고지에다 로마시대의 이야기를 손으로 쓴다고 말했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면서 글을 쓴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상상력 훈련임을 이 직업 문필가의 말씀에서 크게 감명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2008년 2월 10일, 한 부랑인의 방화로 숭례문(崇禮門)은 온 국민이 바라보는 앞에서 불타 참담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다섯 해 만인 올해에 많은 국가 예산과 온 국민의 정성 속에서 복원공사를 끝내고, 불난 일이 마치 전화위복인 양 당당하게 우리 앞에 다시 모셔진 국보일호를 칭송하면서 축하행사를 벌였다. 바로 몇 개월 전의 일이었다. 복원공사가 진행되던 지난 다섯 해 동안 우리는 마치 이 세상에서 문화재를 가장 아끼고 갈무리 잘하는 문화재 일등국민이 된 듯, 온갖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데 복원 숭례문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다시금 우리 앞에 추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우리나라 문화재 복원의 일류 전문가들이 총동원된 이 복원사업이 아예 수포로 돌아간 듯싶다.
우리 문화재의 현실은 뜻있는 이들에 의해 그동안 끊임없이 위기가 경고되 왔다. 문화재를 다루거나 현장을 지키는 거의 대부분의 조건들이 숭례문 사태를 예고하는 현장임을 알아야 한다. 많은 문화재들이 이미 손상되었거나 손상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기록문화재는 상거래에 맡겨져 방치돼 있거나, 최근에 완간을 본 ‘우현 고유섭전집(又玄 高裕燮全集)’처럼 사립 출판사가 심혈을 기울여 정리하지 않았다면 문화재로서 영원히 존재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놀라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 문화유산 답사기’ 서평을 쓰면서, 그 답사기에 앞서 1982년 한창기 님에 의해 뿌리깊은 나무에서 간행된 열 권짜리 ‘한국의 발견’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문화에 관해 폭넓은 시야와 유존의 방식을 제시했고 이를 실천했던 한창기! 그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는 그 책머리에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를 편찬한 외로운 선구자 고산자(古山子) 님께 바친다는 헌사(獻辭)가 있어 매우 뜻깊게 하고 있다.
고산자나 한창기처럼 인간주의의 깃발을 드는 국민이 많지 않은 한 우리 문화재의 현실은 밝을 수가 없다.
〈열화당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