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별아의 문학과 삶] '오래된 것'을 사랑하는 마음
2013년 11월 08일(금) 00:00 가가
자식을 겉 낳지, 속은 못 낳는다는 속담처럼 내 배를 앓아 낳은 아이가 낯설고 신기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올해 열여덟 살, 고등학교 2학년생인 아들아이는 별스럽게도 ‘오래된 것’을 좋아한다.
처음엔 남자아이들이 대개 한 번씩 거쳐 가는 자동차에 대한 취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모터쇼를 찾아다니며 최신형 자동차들을 섭렵하던 아이는 어느 때부터인가 ‘올드 카’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단종 되어버린 모델인 포니, 스텔라, 르망 등을 어쩌다 발견하기라도 하면 환호를 올리며 사진을 찍어대고, 지금도 갖고 싶은 첫 차로 최신형차도, 외제차도 아닌 1970년대에 생산된 ‘브리샤’를 꼽는다.
특정한 것에 열광하는 ‘마니아’ 기질이라곤 전혀 없는 엄마로서는 그저 놀라울 뿐이지만, ‘오래된 것’에 대한 아이의 취향은 자동차에서 그치지 않았다. 뮤지컬 ‘맘마미아’를 본 뒤로 아이는 스웨덴 그룹 ‘아바(ABBA)’의 팬이 되었다. 그때 아이의 나이는 열 살, 아바가 해체될 때로부터 십여 년이 지나 태어난 녀석이 멤버들의 신상이며 해외공연 에피소드 따위를 줄줄 외우고 다녔다.
아바의 레퍼토리가 생각보다 풍부하지 않느니 어쩌니 투덜대더니 끝내 그 이름도 찬란한 팝의 전설 ‘비틀즈’로 관심이 옮아갔다. 그리고 지금껏 칠팔 년이 넘도록 비틀즈의 ‘광팬’을 자처하며 마침내 지난 겨울엔 런던과 리버풀로 ‘성지 순례’까지 다녀오기에 이르렀다.
음악에 대한 취향만 유다른가 싶더니 엉뚱한 데로 불똥이 튀었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에 떠난 여행에서 우연히 군산선 임피역에 다녀온 후부터 시골 간이역이 아이의 새로운 관심거리가 된 것이다. 중앙선, 호남선, 전라선, 광주선, 태백선, 정선선, 장항선, 경북선, 문경선… 등 전국 곳곳에 숨은 간이역들을 찾아다니는 기행이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급수탑이 있는 호남선 연산역이며, 1914년에 지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이라는 전라선의 춘포역을 찾았을 때 아이의 얼굴은 마치 보물을 찾은 것처럼 환하게 빛났다.
사실 현장에 가보면 덩그러니 오래된 역사가 남아있을 뿐 주변의 풍광은 황폐하기 이를 데 없다. 역무원이 없고, 이따금 완행차가 정차만 하는 간이역은 도로망의 발달과 급행열차의 등장으로 점차 그 기능을 잃고 폐쇄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는 웬일인지 그 폐허가, 적막이, 누추한 흔적에 마음이 끌린다는 것이다.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어쨌거나 개인의 취향이니 반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난 방학 미륵사지에 다녀온 뒤로 살금살금 ‘폐사지(廢寺址)’에 관심을 두려 할 때는 기어이 말릴 수밖에 없었다. 간이역을 찾아 산간 오지 골짝을 뒤지는 것으로도 모자라 주춧돌 몇 개로 남은 옛 절터라니….
나중에 직접 차를 몰고 찾아다닐 게 아니라면 집안 식구들을 총동원한 기행은 이쯤에서 그만하라고 애원해야 했다. 아이는 그제야 “하긴 나도 내년에 고3이니…”하며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입시가 끝나면 문화재로 지정된 103개 폐사지는 반드시 찾아보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숨기지 않았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엄마의 취향과 상관없이, 반짝거리는 신제품들에 열광하는 또래과 무관하게, 대체 무엇이 아이를 오래된 것, 소용을 잃은 것,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것들로 이끄는 걸까? 아이는 ‘속도’의 경쟁이 싫다고 한다. 더 빠르게 빠르게만 달리는 세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 변할 수 없는 것을 찾고 싶다고 한다.
유행가보다는 옛 노래가 좋고, 급행열차보다는 완행열차가 좋고, 넓은 도로와 으리으리한 새 건물보다는 조붓한 골목과 낡은 옛집이 좋다는 것이다.
오래된 것은 낡은 것이라는 공식이 버젓이 통하는 세상이다. 새로운 것을 짓기 위해서는 낡은 것을 당연히 허물어버려야 한다고 믿는다. 속도의 멀미를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느림의 미학’을 찾기 시작했지만, 모 이동통신 광고는 전자책 ‘느림의 미학’을 최신형 스마트폰으로 얼마나 더 빨리 다운 받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조롱 혹은 역공한다.
세상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자기만의 속도로 살아가기 위해 아이는 외로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라져가는 것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쓸쓸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외로운 만큼, 쓸쓸한 만큼 더욱 강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오래된 것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것들이 견뎌온 시간을 상상하는 힘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옛날 자동차, 흘러간 노래, 폐허가 되어버린 간이역과 절터…. 하지만 그것들이 빛났던 순간과 그때의 사람들을 떠올리면 시간은 다만 흘러버리는 것이 아닌 듯하다. 아무리 빠르게 가도, 조금 느리게 가도, 우리 모두는 언젠가 한 곳에 다다르리니. ‘오래된 것’을 사랑하는 아들의 새로운 마음이 사랑옵다.
〈소설가〉
처음엔 남자아이들이 대개 한 번씩 거쳐 가는 자동차에 대한 취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모터쇼를 찾아다니며 최신형 자동차들을 섭렵하던 아이는 어느 때부터인가 ‘올드 카’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단종 되어버린 모델인 포니, 스텔라, 르망 등을 어쩌다 발견하기라도 하면 환호를 올리며 사진을 찍어대고, 지금도 갖고 싶은 첫 차로 최신형차도, 외제차도 아닌 1970년대에 생산된 ‘브리샤’를 꼽는다.
아바의 레퍼토리가 생각보다 풍부하지 않느니 어쩌니 투덜대더니 끝내 그 이름도 찬란한 팝의 전설 ‘비틀즈’로 관심이 옮아갔다. 그리고 지금껏 칠팔 년이 넘도록 비틀즈의 ‘광팬’을 자처하며 마침내 지난 겨울엔 런던과 리버풀로 ‘성지 순례’까지 다녀오기에 이르렀다.
사실 현장에 가보면 덩그러니 오래된 역사가 남아있을 뿐 주변의 풍광은 황폐하기 이를 데 없다. 역무원이 없고, 이따금 완행차가 정차만 하는 간이역은 도로망의 발달과 급행열차의 등장으로 점차 그 기능을 잃고 폐쇄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는 웬일인지 그 폐허가, 적막이, 누추한 흔적에 마음이 끌린다는 것이다.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어쨌거나 개인의 취향이니 반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난 방학 미륵사지에 다녀온 뒤로 살금살금 ‘폐사지(廢寺址)’에 관심을 두려 할 때는 기어이 말릴 수밖에 없었다. 간이역을 찾아 산간 오지 골짝을 뒤지는 것으로도 모자라 주춧돌 몇 개로 남은 옛 절터라니….
나중에 직접 차를 몰고 찾아다닐 게 아니라면 집안 식구들을 총동원한 기행은 이쯤에서 그만하라고 애원해야 했다. 아이는 그제야 “하긴 나도 내년에 고3이니…”하며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입시가 끝나면 문화재로 지정된 103개 폐사지는 반드시 찾아보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숨기지 않았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엄마의 취향과 상관없이, 반짝거리는 신제품들에 열광하는 또래과 무관하게, 대체 무엇이 아이를 오래된 것, 소용을 잃은 것,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것들로 이끄는 걸까? 아이는 ‘속도’의 경쟁이 싫다고 한다. 더 빠르게 빠르게만 달리는 세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 변할 수 없는 것을 찾고 싶다고 한다.
유행가보다는 옛 노래가 좋고, 급행열차보다는 완행열차가 좋고, 넓은 도로와 으리으리한 새 건물보다는 조붓한 골목과 낡은 옛집이 좋다는 것이다.
오래된 것은 낡은 것이라는 공식이 버젓이 통하는 세상이다. 새로운 것을 짓기 위해서는 낡은 것을 당연히 허물어버려야 한다고 믿는다. 속도의 멀미를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느림의 미학’을 찾기 시작했지만, 모 이동통신 광고는 전자책 ‘느림의 미학’을 최신형 스마트폰으로 얼마나 더 빨리 다운 받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조롱 혹은 역공한다.
세상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자기만의 속도로 살아가기 위해 아이는 외로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라져가는 것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쓸쓸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외로운 만큼, 쓸쓸한 만큼 더욱 강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오래된 것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것들이 견뎌온 시간을 상상하는 힘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옛날 자동차, 흘러간 노래, 폐허가 되어버린 간이역과 절터…. 하지만 그것들이 빛났던 순간과 그때의 사람들을 떠올리면 시간은 다만 흘러버리는 것이 아닌 듯하다. 아무리 빠르게 가도, 조금 느리게 가도, 우리 모두는 언젠가 한 곳에 다다르리니. ‘오래된 것’을 사랑하는 아들의 새로운 마음이 사랑옵다.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