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웅의 영혼도서관] 추석 명절, 어떤 이야기를 나눌 것인가?
2013년 09월 17일(화) 00:00 가가
가을이다. 어느새 청명한 계절이 높푸른 하늘을 떠받들면서 무더위에 지친 우리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둥근 추석 달이 동산 위에 휘둥그렇게 떠올랐다. 내 고향 강릉 선교장(船橋莊)에서의 추석 풍경이 소슬한 가을 바람과 함께 나의 추억 속에서 오롯이 떠오른다.
지금으로부터 오륙십 년 전에는 ‘고된 농사일’과 ‘슬픈 가난’이라는 두 등짐이 우리들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가난 속에서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풍요로운 가을걷이 한가위 때면, 배고픔과 더위에 지친 착한 농부와 그 가족은 만복감에 젖는다. 이 계절은 한 해의 노고를 스스로 위로하고 풍년을 자축하는, 이를테면 우리 식의 추수감사절이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추석 명절이 된 것일 터이다.
날이 어두워지자, 선교장 뒷동산엔 손불을 든 동네 아이들이 떼지어 달을 향해 소리친다. “만월(滿月)이요….” 가난했던 시절의 달맞이 마음은 어느 보름보다도 한가위 때가 제일이었다. 아이들의 소리는 풍요로움을 싣고 온 가을곡식을 예찬하는 노래처럼 아름다웠다. 갖가지 햇과일들이 아이들의 입맛을 채워 주었고, 복에 겨운 그들의 외침은 멀리멀리 가을 들판에 울려 퍼졌다.
선교장 집안을 비롯한 마을의 여러 집들은 그들의 가세(家勢)에 맞춰 제례(祭禮) 준비를 서두른다. 대부분이 이곳 농경 마을에 뿌리 내리고 살아온 집안들이다. 가족들 가운데에는 간혹 타향살이를 하던 사람이나 일시적으로 외지에 나가 있던 이들도 빠짐없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다.
제사(祭祀)는 가족들끼리 또는 집안끼리의 오랜 유형을 갖는다. 제사는 성묘(省墓)로 이어진다. 모두가 추원보본(追遠報本)의 깊은 뜻을 두면서 오늘의 가족들의 결속과 안녕과 배움을 도모하는 뜻이 크다. ‘추원’이나 ‘보본’ 모두 인간존재의 근원을 향한 간절한 염원과 소망, 그리고 조상을 향한 존경과 그리움을 담고 있다.
그때 그 시절, 추석에 모인 가족들은 무슨 말들을 주고받았을까. 그때로부터 육십 년이 지난 요즈음 우리네 가족들은 모여 무슨 이야기들로 꽃을 피울까. 육십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두 세대 사이의 이야기들을 비교해 보고 싶어졌다. 이런 관심은, 오늘의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가치관의 깊이를 알고 싶어서이고, 이것이 바로 사회문화적 구조나 무게를 가늠해 보는 중요한 관찰이리라는 믿음에서이다.
독일의 문예이론가 발터 벤야민은 ‘일방통행길’이라는 글에서 “자유롭게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이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 이전에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상대방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는 것이 당연했으나, 지금은 상대방의 구두나 우산 값을 물어보는 게 고작이다”라고 적고 있다. 2차 세계대전 훨씬 전의 글이다.
전쟁이 끝날 무렵부터 20년 사이인 내 어린 시절의 추석절을 떠올려 본다. 그때로부터 오십 년이 흐른, 바야흐로 전자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추석 명절에서 어떤 뜻과 의미를 찾을 것인가.
옛집 선교장 사랑방에 모인 어른들은 마을에서 늘 만나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그저 차분하고 정리가 잘 되어 있어 논쟁적이지 않았다. 위아래 없이 남의 말을 경청하는 분위기다. 예법도 있어 좌중엔 교감의 흐름이 조용히 흐른다. 대화에 끼어들어 흐름을 방해할 어떤 미디어도 없다.
농사(農事)일이 화제의 주류를 이룬다. 농사일에 관해 무슨 할 말이 많겠냐고 물으면, 그건 너무 모르는 말씀이다. 농사를 빌미 삼아 하늘과 땅의 이치를 가늠해 보면서, 종국에는 자연의 섭리를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먹거리를 마련함이 농사일이라지만, 곡식과 과실과 가축을 거두고 타작하고 갈무리하는 모든 과정에서 절제와 조화와 균형, 그리고 인간애로 가득한 처분(處分)과 처신(處身)이 요구되는 일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가난이 축복일 때가 많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반대로, 부유함이 재앙을 몰고 올 때가 많음을 경고하는 이들이 많음도 사실이고, 이러한 징후들은 많이 있다. 한가위 때 가족끼리 모이는 본능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온 국토가 대이동의 행렬로 몸살을 앓는다. 기를 써 가며 모인 가족들이 이삼 일 동안 나누는 대화들은 과연 어떨까.
내 어린 시절에 비해 지금 우리는 엄청난 부자가 되어 있다. 모처럼 사랑방에 모인 식구들이 나누는 화제에서부터, 그 대화마저 방해하는 텔레비전이며, 집안 이 구석 저 구석에 흩어져서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있을 젊은이들 하며, 고속도로 휴게소나 이동하는 차 안에서 쿵작거리는 오디오들의 소음 때문에 우리는 참된 인간의 대화, 곧 하늘의 이치, 땅의 이치, 인간의 이치 그리고 우주의 섭리를 논할 어느 구석마저 찾을 수 없게 돼 간다.
이렇듯 안타까운 추석 명절을 앞으로 얼마 동안을 맞이해야 하는 것인가.
〈열화당 대표〉
지금으로부터 오륙십 년 전에는 ‘고된 농사일’과 ‘슬픈 가난’이라는 두 등짐이 우리들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가난 속에서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풍요로운 가을걷이 한가위 때면, 배고픔과 더위에 지친 착한 농부와 그 가족은 만복감에 젖는다. 이 계절은 한 해의 노고를 스스로 위로하고 풍년을 자축하는, 이를테면 우리 식의 추수감사절이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추석 명절이 된 것일 터이다.
제사(祭祀)는 가족들끼리 또는 집안끼리의 오랜 유형을 갖는다. 제사는 성묘(省墓)로 이어진다. 모두가 추원보본(追遠報本)의 깊은 뜻을 두면서 오늘의 가족들의 결속과 안녕과 배움을 도모하는 뜻이 크다. ‘추원’이나 ‘보본’ 모두 인간존재의 근원을 향한 간절한 염원과 소망, 그리고 조상을 향한 존경과 그리움을 담고 있다.
독일의 문예이론가 발터 벤야민은 ‘일방통행길’이라는 글에서 “자유롭게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이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 이전에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상대방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는 것이 당연했으나, 지금은 상대방의 구두나 우산 값을 물어보는 게 고작이다”라고 적고 있다. 2차 세계대전 훨씬 전의 글이다.
전쟁이 끝날 무렵부터 20년 사이인 내 어린 시절의 추석절을 떠올려 본다. 그때로부터 오십 년이 흐른, 바야흐로 전자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추석 명절에서 어떤 뜻과 의미를 찾을 것인가.
옛집 선교장 사랑방에 모인 어른들은 마을에서 늘 만나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그저 차분하고 정리가 잘 되어 있어 논쟁적이지 않았다. 위아래 없이 남의 말을 경청하는 분위기다. 예법도 있어 좌중엔 교감의 흐름이 조용히 흐른다. 대화에 끼어들어 흐름을 방해할 어떤 미디어도 없다.
농사(農事)일이 화제의 주류를 이룬다. 농사일에 관해 무슨 할 말이 많겠냐고 물으면, 그건 너무 모르는 말씀이다. 농사를 빌미 삼아 하늘과 땅의 이치를 가늠해 보면서, 종국에는 자연의 섭리를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먹거리를 마련함이 농사일이라지만, 곡식과 과실과 가축을 거두고 타작하고 갈무리하는 모든 과정에서 절제와 조화와 균형, 그리고 인간애로 가득한 처분(處分)과 처신(處身)이 요구되는 일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가난이 축복일 때가 많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반대로, 부유함이 재앙을 몰고 올 때가 많음을 경고하는 이들이 많음도 사실이고, 이러한 징후들은 많이 있다. 한가위 때 가족끼리 모이는 본능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온 국토가 대이동의 행렬로 몸살을 앓는다. 기를 써 가며 모인 가족들이 이삼 일 동안 나누는 대화들은 과연 어떨까.
내 어린 시절에 비해 지금 우리는 엄청난 부자가 되어 있다. 모처럼 사랑방에 모인 식구들이 나누는 화제에서부터, 그 대화마저 방해하는 텔레비전이며, 집안 이 구석 저 구석에 흩어져서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있을 젊은이들 하며, 고속도로 휴게소나 이동하는 차 안에서 쿵작거리는 오디오들의 소음 때문에 우리는 참된 인간의 대화, 곧 하늘의 이치, 땅의 이치, 인간의 이치 그리고 우주의 섭리를 논할 어느 구석마저 찾을 수 없게 돼 간다.
이렇듯 안타까운 추석 명절을 앞으로 얼마 동안을 맞이해야 하는 것인가.
〈열화당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