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별아의 문학과 삶] 시를 베껴 쓰다
2013년 09월 13일(금) 00:00 가가
‘문학’과 ‘시 창작’ 수업을 듣는 고등학생 아들아이가 수행평가로 각각 25편, 30편의 시를 베껴 쓰고 감상을 적는 숙제를 받아왔다. 좋은 시를 추천해 달라는 아이의 요청에 오랜만에 시집들이 꽂힌 책장을 뒤적인다. 그 중 대부분은 ‘시의 시대’라고 일컬어졌던 1980년대에 출간된 ‘고전’들이다.
그때 나는 어섯눈을 겨우 뜬 문학도로서 끓어오르는 감성과 감상을 시로 달래었다. 지나간 모든 날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밤을 지새워 시를 읽던 천둥벌거숭이 시절은 내가 기억하는 가장 뜨겁고도 깊은 나날이다.
실로 1980년대는 산문적이라기보다 시적이었다. 시인들은 시를 ‘뿜어냈고’ 독자들은 걸신스레 그것을 ‘빨아들였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시집이 몇만, 몇십 만 부씩 팔리는 일도 흔했다. 유다른 독서광이 아니더라도 ‘애송시’ 몇 편쯤은 내세울 수 있었고, 길거리에서 시집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사람들을 발견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시인 신경림 선생이 일본 작가들을 만난 자리에서 시집 ‘농무’가 20만 부나 팔렸다고 했더니, 일본 작가들이 혹시 2만 부를 20만 부로 잘못 말한 게 아니냐고 되물었다는 일화도 있다.
“소설의 시대가 가고 시의 시대가 왔다!”는 말이 공공연해진 연유는 1980년대가 시작되던 그해 5월 광주에서 비롯되었다.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에 다름 아닌 정치 상황 속에서 소설은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소설은 당장의 사건이나 변화에 반응해서 창작되기보다는 그것을 해석할 만한 ‘객관적 거리’를 확보한 이후 이루어지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에 목마른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분노와 슬픔과 아픔을 달래줄 무언가가 절실했다. 이해이자, 위로이자, 다짐이자 약속인 시, 바로 그것이었다.
시인은 소설 ‘25시’의 작가 게오르규가 비유한대로 ‘잠수함의 토끼’와 같은 존재다. 잠수함 밑에서 오염되는 공기를 가장 먼저 낌새채고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리하여 무고하고 무탈해 보이는 세상 속에서도 ‘깎아지른 절벽과/ 허공 사이에 선 나무들(고광헌)’과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음(이성복)’을 느끼며 ‘밤새도록 고인 마음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김수영)’고 중얼거리는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출판계에서 시의 위치는 예전의 영화를 떠올리기 민망할 만큼 초라하다. 시집이 베스트셀러 순위에 진입하지 못한지는 이미 오래되었고, 간혹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는 시집은 이른바 ‘낙서시’ 모음이거나 예전부터 유명했던 시들의 짜깁기에 다름 아니다. 시집 초판을 팔기는커녕 시집을 출판하는 것조차 어려워진 시대에, 그 많던 시인들은 어디로 갔을까? 어디로 가야 할까?
나는 입버릇처럼 ‘소설은 천민의 예술, 시는 천상의 예술’이라고 말한다. 내 일이자, 업이자 구원인 소설을 폄하해서가 아니라 소설이나 산문과는 분명히 다른 시의 자리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의미에서다. 문득 내가 쓰는 글이 너무 건조하다고 느껴질 때, 아니 내 삶이 버석버석한 먼지 같다고 느낄 때, 나는 다시 시를 읽는다.
먹이사슬의 하위에 속하는 초식동물로서 천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자 잘 때도 깊은 잠에 빠지지 않고 눈을 뜨고 자는 토끼의 불안, 극심한 심리적 억압을 받으면 심지어 제가 낳은 새끼의 목을 물어뜯어 죽이기까지 하는 토끼의 신경증을 엿보며 내가 살고 있는 땅과 내가 잊고 사는 삶을 다시 한 번 돌이킨다.
요즘 들어 부쩍 시가 어렵다고, 잘 읽히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왜 자꾸 하느냐는 불평도 듣는다. 나 역시 읽기 어려운 시가 있고,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시들이 있다.
하지만 시인들이 오랜 공력을 들여 펴낸 시집 한 권을 꼼꼼히 읽노라면 반드시 한두 편은 내 마음에 와 닿는 시가 있고, 그로부터 시작해 다른 ‘어려운’ 시들을 이해하게 된다. 아무리 난해한 시라도 불가해한 삶과 세상만큼은 아니다.
‘법구경’에서는 욕망에 젖어 넋을 잃은 중생을 ‘덫에 걸린 토끼’로 비유한다. 토끼는 한없이 약하고 순한 짐승이지만 그의 이빨은 평생토록 자란다고 한다. 덫에 걸린 토끼가 빠져나가는 길은 이빨로 강철 덫을 자르고 벗어나는 것이란다.
아직 세상에 홀로 내보내기엔 어리게만 보이는 아들아이가 골라 필사해놓은 시들을 읽어본다. 또박또박 눌러쓴 시가 아이의 마음 속에 피워놓은 꽃 한 송이가 소박한 감상으로 올올하다.
독자들이 시를 더 열심히, 더 많이 읽을 때 토끼의 이빨은 더욱 날카로워질 것이다. 강철처럼 단단하게만 보이는 세상의 덫을 끊어 내칠 수 있을 때까지.
〈소설가〉
그때 나는 어섯눈을 겨우 뜬 문학도로서 끓어오르는 감성과 감상을 시로 달래었다. 지나간 모든 날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밤을 지새워 시를 읽던 천둥벌거숭이 시절은 내가 기억하는 가장 뜨겁고도 깊은 나날이다.
시인 신경림 선생이 일본 작가들을 만난 자리에서 시집 ‘농무’가 20만 부나 팔렸다고 했더니, 일본 작가들이 혹시 2만 부를 20만 부로 잘못 말한 게 아니냐고 되물었다는 일화도 있다.
시인은 소설 ‘25시’의 작가 게오르규가 비유한대로 ‘잠수함의 토끼’와 같은 존재다. 잠수함 밑에서 오염되는 공기를 가장 먼저 낌새채고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리하여 무고하고 무탈해 보이는 세상 속에서도 ‘깎아지른 절벽과/ 허공 사이에 선 나무들(고광헌)’과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음(이성복)’을 느끼며 ‘밤새도록 고인 마음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김수영)’고 중얼거리는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출판계에서 시의 위치는 예전의 영화를 떠올리기 민망할 만큼 초라하다. 시집이 베스트셀러 순위에 진입하지 못한지는 이미 오래되었고, 간혹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는 시집은 이른바 ‘낙서시’ 모음이거나 예전부터 유명했던 시들의 짜깁기에 다름 아니다. 시집 초판을 팔기는커녕 시집을 출판하는 것조차 어려워진 시대에, 그 많던 시인들은 어디로 갔을까? 어디로 가야 할까?
나는 입버릇처럼 ‘소설은 천민의 예술, 시는 천상의 예술’이라고 말한다. 내 일이자, 업이자 구원인 소설을 폄하해서가 아니라 소설이나 산문과는 분명히 다른 시의 자리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의미에서다. 문득 내가 쓰는 글이 너무 건조하다고 느껴질 때, 아니 내 삶이 버석버석한 먼지 같다고 느낄 때, 나는 다시 시를 읽는다.
먹이사슬의 하위에 속하는 초식동물로서 천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자 잘 때도 깊은 잠에 빠지지 않고 눈을 뜨고 자는 토끼의 불안, 극심한 심리적 억압을 받으면 심지어 제가 낳은 새끼의 목을 물어뜯어 죽이기까지 하는 토끼의 신경증을 엿보며 내가 살고 있는 땅과 내가 잊고 사는 삶을 다시 한 번 돌이킨다.
요즘 들어 부쩍 시가 어렵다고, 잘 읽히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왜 자꾸 하느냐는 불평도 듣는다. 나 역시 읽기 어려운 시가 있고,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시들이 있다.
하지만 시인들이 오랜 공력을 들여 펴낸 시집 한 권을 꼼꼼히 읽노라면 반드시 한두 편은 내 마음에 와 닿는 시가 있고, 그로부터 시작해 다른 ‘어려운’ 시들을 이해하게 된다. 아무리 난해한 시라도 불가해한 삶과 세상만큼은 아니다.
‘법구경’에서는 욕망에 젖어 넋을 잃은 중생을 ‘덫에 걸린 토끼’로 비유한다. 토끼는 한없이 약하고 순한 짐승이지만 그의 이빨은 평생토록 자란다고 한다. 덫에 걸린 토끼가 빠져나가는 길은 이빨로 강철 덫을 자르고 벗어나는 것이란다.
아직 세상에 홀로 내보내기엔 어리게만 보이는 아들아이가 골라 필사해놓은 시들을 읽어본다. 또박또박 눌러쓴 시가 아이의 마음 속에 피워놓은 꽃 한 송이가 소박한 감상으로 올올하다.
독자들이 시를 더 열심히, 더 많이 읽을 때 토끼의 이빨은 더욱 날카로워질 것이다. 강철처럼 단단하게만 보이는 세상의 덫을 끊어 내칠 수 있을 때까지.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