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는 참으로 풍요로운 고장이다. 이곳엔 없는 게 없다고 할 정도다. 오묘한 산과 강, 그리고 바다에서 빚어내는 풍부한 물산(物産)이 오랜 인간의 역사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면서 이곳만의 독특한 문화의 인자(因子)를 쌓아 왔다. 아마 그래서 ‘빛고을’이라 일컬어져 왔을 것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광주는 500㎢의 광주광역시라는 행정구역이 아니다. 오랜 인간의 역사가 이곳을 중심으로 이뤄 온 취락(聚落), 곧 함께 모여 삶을 가꿔 온 광주권을 가리키는 것이니, 경계는 모호하나 더 넓게 인근을 아우르는 광주의 문화권역(文化圈域)을 이르는 지역개념이다.

우리의 지리개념이 언제부턴가 행정구역으로 재단되는 기세에 눌려 인문적인 권역의 인식이 모호해졌다. 이런 무모한 지역 가르기가 인문지리학을 유치한 모습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모든 일이 행정구역에 따라 움직이다 보니 우리 삶이 부지불식간에 행정편의 아래 획일돼 가고 있어 안타깝다.

오늘 나는 광주의 참얼굴, 그리고 그 역사를 더듬어 어루만지면서 다시 한번 깊디깊은 생각에 잠겨 본다. 나는 언제부턴가 광주를 지혜(智慧)의 땅이라 부르곤 해 왔다. 1964년 육군 소위로 임관된 나는 이곳에 자리하던 전투병과 교육사령부 산하의 보병학교에서 재교육을 받기 위해 입소하면서 광주와 첫 인연을 맺는다.

그 시절 우리는 무척이나 가난했었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크게 어려움 없이 자랐던 내가 우리나라의 가난이 이토록 심했었던가 하면서, 그 현실에 부딪힐 때마다 놀라움 속에서 하나하나 깨달아 가던 무렵이었다. 고된 훈련 속에서, 그리고 청년 시절에 접했던 광주의 주변과 그 도시 중심거리와 사람들의 풍경은 나의 뇌리에 깊이 각인돼 있다.

나라가 온통 가난한 얼굴로 찌들어 있는 가운데, 이곳 광주만이 유독히 지혜로운 얼굴과 다사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구체적인 이유를 나는 알지 못했다. 그저 느낌으로 다가왔던 도시였기에 말이다.

우선 사람들이 그랬다. 만나는 사람마다 곱고, 아름다웠다. 광주 말씨인 남도 사투리에서 인간미와 예술적 감흥이 짙게 묻어났다. 좋은 상대라 느껴지면 그 상대의 마음 속 깊은 데에서 뭔가를 우려내어 가져가려는, 광주 사람들이라면 다 내줘도 좋지 하는, 뭔가 내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솟구쳐 올라오곤 했다.

놀랍게도, 그 젊은 날의 나의 생각이 지금도 똑같이 느껴짐은 어인 일일까. 광주는 지금도 여전히 초심을 잃지 않고 변함없이 내 앞에 있다.

그 후 지금까지 광주를 방문할 때마다 나는 60년대에 나를 향해 발하던 그 지혜로운 빛들이 어디서 발원(發源)하고 있었던가를 살피곤 한다. 크고 작은 빛들이 오늘도 변치 않고, 도처에서 발사하고 있음에 새삼 놀란다. 우선 문화재들이다. 모두가 알 만한 지정문화재들뿐만 아니라 여기서 특별히 이르고자 하는 문화재란 문화재정책이 아직 미치지 아니한, 언뜻 보면 그저 보잘것없어 보이는 ‘작은 문화재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광주의 곳곳에서 내 눈에 잡힌다. 규모나 연륜이 그리 높지는 않으나 몇 세대를 거쳐 광주인들의 입김이 서린 존재들을 발견하고, 이것이야말로 참된 문화재이구나, 그러나 문화재로서 지정받지는 않았으되 오늘의 우리 삶에 자연스레 무르녹아 있어 왔구나 하고 무릎을 친다.

하지만 이들을 우리 삶의 문화재로서 유존시켜야 하는데, 불안하기 이를 데 없다. 쉽게 훼손될 수 있는 가녀리고 연약한 존재들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광주를 향한 내 나름의 발견은, 그같은 유형의 실체들이 무형의 존재들에 교묘히 연장돼 있어, 무형의 문화인자(文化因子)들로 광주 사람들의 마음과 손끝과 형태 속에 존재하고 있구나 하는 깨달음으로 스스로도 놀라고 있다.

지혜로운 광주, 보배로운 광주를 지켜나가려면, 그리고 한걸음 나아가 더욱 아름답게 가꿔내려면, 간단하고 쉬운 이 깨달음과 발견에 주목하고 귀기울여야 한다. 등잔 밑이 어둡단 말이 있듯이, 광주 안에서는 광주의 진실(眞實)과 진가(眞價)를 바로 보기 힘들다.

“광주는 아시아문화중심도시다”고 소리쳐 외친다고 해서 광주의 보배로움이 지켜지는 게 아니다. 생활 속에 무르녹아 있는 광주다운 유형·무형의 작은 문화재들을 우리 삶, 우리 땅 속에 자연스레 온존시키는 일이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한다. 거대한 예산이 투입된다고 해서, 또는 세계적으로 뛰어난 문화요소들을 무모하게 가져다가 이곳에 첨가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우선 광주다운 요소들이 초석(礎石)을 이루고, 그런 다음 그 위에 ‘아시아문화중심도시’가 세워져야 할 것이다. 이 자명(自明)한 이치를 다시 한번 강조드리고 싶다.

〈열화당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