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김별아의 문학과 삶(16일자)
2013년 08월 16일(금) 00:00 가가
삶의 맛, 꿈의 맛
길목에 들어서는 순간 이국적인 향신료 냄새가 코를 쏜다. 동남아시아에서 즐겨먹는 고수부터 인도 음식에서 빠질 수 없는 마살라까지. 전국 최초의 외국인 주민 센터와 다문화 작은 도서관을 구경할 겸 안산으로 짧은 나들이를 꾸민 길이었다. 그 참에 겸사겸사 “탤런트 김태희를 닮은 아가씨가 소를 몰고 한가인을 닮은 여자가 밭을 간다”는 미녀의 나라로 알려진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 식당 ‘사마리칸트’에서 색다른 음식을 맛보기로 했다.
몇 해 전 캐나다에 체류하는 동안 한국계 이민자들로부터 “타국에서 산다는 것은 몸도, 마음도 점점 가난해지는 일”이라는 말을 종종 듣곤 했다. 남다른 삶과 꿈을 좇아 모국을 떠나왔지만 세상 어디에서도 삶을 일구고, 꿈을 이루는 일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어쩌면 더 큰 고난에 맞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유지할 수 있는 타향살이에서 짐짓 가난해져가는 몸과 마음을 위로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입맛에 맞는 익숙한 고국의 음식을 먹는 것이었다. 여태껏 허기를 달래고 끼니를 때우는 수준으로 밥과 반찬을 만들어왔던 내가 처음으로 ‘요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도 캐나다 생활을 통해서였다.
한식요리를 위한 양념이며, 재료를 완비하기 힘들고, 한국 슈퍼마켓의 식재료 가격은 현지 식료품점에 비해 1.5배 정도로 비쌌지만 그럴수록 예전에 먹었던 음식이 그리웠다. 한인타운에 다양한 한식당들이 있지만 맛이나 가격 면에서 몸과 마음이 가난한 체류자를 만족시키기 힘들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그때부터 팔을 걷어붙이고 신물질 개발에 몰두하는 연구자의 자세로 각종 요리 사이트와 블로그를 전전하며 요리 독학을 시작했다. 초야에 묻힌 요리 고수들의 화학 공식 못잖은 정교한 레시피도 도움이 되었지만, 무엇보다 요리는 풍부한 상상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더하고 빼고 섞고 뒤집는 가운데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기억 속에 자리한 바로 ‘그 맛’을 접시에 담기 위해 부엌을 쑥대밭으로 만들곤 했다. 배추김치와 파김치, 간장게장과 감자탕, 약식과 육개장을 거쳐 마침내 수산물시장에서 ‘구경’했던 소금에 절여 빨갛게 색이 변한 오징어까지 기억해내어 냉동 오징어를 절였다가 젓갈을 담그기에 이르렀다.
갓 지은 따끈한 밥에 짭짜름한 오징어 젓갈 한 절음을 올려 입안에 넣었을 때, 나는 기어코 먹고 살겠노라고 이렇게 발버둥치는 스스로의 의지에 콧등이 시큰하기까지 하였다.
우즈베키스탄 식당 ‘사마리칸트’에는 김태희와 한가인이 없었지만 머나먼 타국에서 고단한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넉넉히 달래주는 우즈베키스탄 음식들이 있다. 나처럼 ‘글로벌 푸드타운’을 찾는 한국인도 있지만 인근 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주요 고객이기에 음식 값 역시 매우 저렴하다.
패스트리 빵 속에 다진 양고기를 듬뿍 넣은 ‘빵 속에 고기’가 한 개에 2000원, 양고기와 쇠고기 꼬치가 한 개에 3000원, 샐러드 류는 각 2000원씩,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자랑하는 사장님이 추천한 양갈비 감자 바베큐가 1만 원으로 가장 비싸다. 양고기 덩어리를 삶은 육수에 감자, 당근, 양파, 양배추, 그리고 빨간 순무를 넣어 끓인 보르스치 스프는 시각적으로 쉽게 적응하기 힘든 분홍색이지만 구수한 국물 맛이 해장국으로 일품이다.
모닥불의 향과 맛을 연상시키는 요리들을 맛보는 동안 1번부터 9번까지 도수대로 이름을 매긴 러시아 맥주가 하나둘 빈병으로 쌓여갔다. 발틱 해의 술이라는 뜻으로 ‘발찌까’라 불리는 그것들 중에서 6번의 흑맥주가 오늘의 술꾼들에겐 최고 인기다. 좋은 사람들과 즐겁게 음식을 나눠먹노라면 어느덧 긴장이 풀려 경계의 벽이 흐너진다.
알근하게 취한 채 ‘사마리칸트’를 나와 중국어, 네팔어, 방글라데시어, 인도네시아어, 베트남어, 러시아어 등등이 마구 뒤섞여 들려오는 거리를 헤쳐 간다. 모국어로 글을 써서 밥을 벌어먹고 사는 작가의 귀에 낯선 언어들은 먼 바다의 물결처럼 아득하다.
삶과 꿈은 다양할수록 맛있다. 맛을 평가하는 데는 동정과 시혜가 없다. 편견과 배타성도 무의미하다. 다문화사회를 둘러싼 우려도 무시할 수 없지만, 꼭꼭 씹어 삼킨 양고기와 맥주는 이미 우리의 배 속에서 소화되어 가고 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을 변형해 토할 수 없으면 삭이라고 해야 할까? 거리가게에서 산 묵직한 열대과일을 품에 안고, 다른 말과 맛과 향이 넘실대는 거리에서 발걸음을 재촉한다. 2차는 짜조(베트남 만두)를 안주 삼아 사이공과 하노이 맥주를 마시러 베트남 식당으로!
〈소설가〉
어쩌면 더 큰 고난에 맞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유지할 수 있는 타향살이에서 짐짓 가난해져가는 몸과 마음을 위로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입맛에 맞는 익숙한 고국의 음식을 먹는 것이었다. 여태껏 허기를 달래고 끼니를 때우는 수준으로 밥과 반찬을 만들어왔던 내가 처음으로 ‘요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도 캐나다 생활을 통해서였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그때부터 팔을 걷어붙이고 신물질 개발에 몰두하는 연구자의 자세로 각종 요리 사이트와 블로그를 전전하며 요리 독학을 시작했다. 초야에 묻힌 요리 고수들의 화학 공식 못잖은 정교한 레시피도 도움이 되었지만, 무엇보다 요리는 풍부한 상상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갓 지은 따끈한 밥에 짭짜름한 오징어 젓갈 한 절음을 올려 입안에 넣었을 때, 나는 기어코 먹고 살겠노라고 이렇게 발버둥치는 스스로의 의지에 콧등이 시큰하기까지 하였다.
우즈베키스탄 식당 ‘사마리칸트’에는 김태희와 한가인이 없었지만 머나먼 타국에서 고단한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넉넉히 달래주는 우즈베키스탄 음식들이 있다. 나처럼 ‘글로벌 푸드타운’을 찾는 한국인도 있지만 인근 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주요 고객이기에 음식 값 역시 매우 저렴하다.
패스트리 빵 속에 다진 양고기를 듬뿍 넣은 ‘빵 속에 고기’가 한 개에 2000원, 양고기와 쇠고기 꼬치가 한 개에 3000원, 샐러드 류는 각 2000원씩,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자랑하는 사장님이 추천한 양갈비 감자 바베큐가 1만 원으로 가장 비싸다. 양고기 덩어리를 삶은 육수에 감자, 당근, 양파, 양배추, 그리고 빨간 순무를 넣어 끓인 보르스치 스프는 시각적으로 쉽게 적응하기 힘든 분홍색이지만 구수한 국물 맛이 해장국으로 일품이다.
모닥불의 향과 맛을 연상시키는 요리들을 맛보는 동안 1번부터 9번까지 도수대로 이름을 매긴 러시아 맥주가 하나둘 빈병으로 쌓여갔다. 발틱 해의 술이라는 뜻으로 ‘발찌까’라 불리는 그것들 중에서 6번의 흑맥주가 오늘의 술꾼들에겐 최고 인기다. 좋은 사람들과 즐겁게 음식을 나눠먹노라면 어느덧 긴장이 풀려 경계의 벽이 흐너진다.
알근하게 취한 채 ‘사마리칸트’를 나와 중국어, 네팔어, 방글라데시어, 인도네시아어, 베트남어, 러시아어 등등이 마구 뒤섞여 들려오는 거리를 헤쳐 간다. 모국어로 글을 써서 밥을 벌어먹고 사는 작가의 귀에 낯선 언어들은 먼 바다의 물결처럼 아득하다.
삶과 꿈은 다양할수록 맛있다. 맛을 평가하는 데는 동정과 시혜가 없다. 편견과 배타성도 무의미하다. 다문화사회를 둘러싼 우려도 무시할 수 없지만, 꼭꼭 씹어 삼킨 양고기와 맥주는 이미 우리의 배 속에서 소화되어 가고 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을 변형해 토할 수 없으면 삭이라고 해야 할까? 거리가게에서 산 묵직한 열대과일을 품에 안고, 다른 말과 맛과 향이 넘실대는 거리에서 발걸음을 재촉한다. 2차는 짜조(베트남 만두)를 안주 삼아 사이공과 하노이 맥주를 마시러 베트남 식당으로!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