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의 호는 ‘미백(未白)’이다. 그의 수필 작호기(作號記)에서 이 아호의 사연을 읽을 수 있는데, 일찍 머리가 하얗도록 세어 버린 그가 노모(老母)께 큰절을 올릴 때마다 “절하지 말고 그냥 앉거라. 에미보다 머리가 센 자식 절을 받으려니 민망스러 못 당할 꼴이다” 하며 만류하시었단다.

그는 1939년 전라남도 장흥군 대덕면(현 회진면) 진목리 참나무골에서 나고 자랐다. 어릴 때의 그는 공부를 썩 잘했다. 교육환경은 열악했지만, 좋은 교사들로 하여 그 시절은 그에게 큰 문학적 자산이 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가 광주서중으로 진학한 것을 두고 주위에선, 진목리에서 천재 났다고 떠들었다. 중학교 3년을 마친 그는 명문 광주일고에 들어가 학업을 마치니, 그가 장흥사람이되 광주사람이기도 했다.

가난한 시골뜨기 이청준이 처음 광주에 몸을 의탁한 곳은 친척 누님 집이었다. 장흥 어머니가 자루에 담아 마련해 준 게를 울러메고 광주 누님에게 선물로 드렸는데, 게는 이미 상할 대로 상해 자루를 받아들자마자 누이는 악취 풍기는 이 게를 바로 쓰레기통에 버리는 일이 생겼다. 그 일로 크게 수모를 느꼈던 회고담이 있다.

“그때 그 쓰레기통에 내던져진 것은 그 썩은 게자루만이 아니었다. 나 자신은 물론 내 척박한 고향시절과 거기서 품어 온 남루하기 그지없는 꿈까지도 가차없이 내던져진 격이었다. 두고 봐라. 나도 이제부턴 이 누추한 시골내기 태를 깡그리 벗으리라. 이를 악물고 너희와 함께할 수 있는 부끄러움 없는 삶의 길을 열심히 배우고 익히리라. 너희 속으로 함께 섞여들어 그 유족(有足)하고, 자랑스런 도회인의 삶의 길을 떳떳하게 살아가리라. 그런 다짐 속에 거의 혼자 힘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대학 진학까지 해 올라갔다.”

광주에서의 두 가지 일은 그를 이해하는 데 기억해 둘 만 하다. 한 가지는, 광주일고 3학년 때 직접선거를 통해 학생회장으로 뽑힌 일이다. 자신의 의지로 출마했고 당선됐지만, 그때의 경험으로 정치에 대한 혐오증을 갖게 된다. 그래서인지, 고향 사람들과 집안에서는 법대(法大) 같은 세속적인 출세의 길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같은 길을 택하지 아니하고 문과(文科)를 지망한 일이다.

또 한 가지는, 고향집이 남의 손에 넘어가고,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는 슬픈 소식을 들은 일이었다. 우리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품 ‘눈길’은 이미 남의 집이 된 옛집에서 어머니를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는 고향 장흥을 오랫동안 찾지 않는다.

내가 이청준을 처음 만난 것은 1969년. 그때 나는 서울의 한 출판사에서 편집을 맡고 있었다. ‘퇴원’, ‘병신과 머저리’, ‘임부’를 비롯해 1966년에서 1969년 동안 발표된 이청준의 소설들을 열독(熱讀)하면서, 동시대 내 또래의 이 젊은 작가가 어쩌면 이런 놀라운 문맥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갈 수 있단 말인가, 탄복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와 만나고 싶었다. 편집자의 본능이었다. 내가 일하던 출판사는 마침 출판의 새 지평을 열기 위해 계획을 세울 때여서, 내 심중에는 이청준의 초기 단편들을 묶는 일에 마음이 가 있었다.

한 식당에서 처음 만난 이청준의 화법은 그의 소설 문맥만큼이나 독특했다. 식사가 끝나 갈 무렵, 나는 이제까지의 그의 소설 전부를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출판하자고 제의한다. 마치 한 청년이 마음에 두고 있던 연인에게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하고 프러포즈하는 모습이었달까. 책 내기 어려웠던 시절이라, 그는 크게 고무된 표정을 지었다.

그 뒤 우리는 열심히 만났고, 열심히 교정보면서 책을 만들었다. 이름하여 “李淸俊創作集 별을 보여드립니다”. 문학평론가 김현(金光南)이 끼어들었고, 장정에 능했던 소설가 김승옥이 가세해, 책은 이제까지 단행본 출판의 형식과 규모를 훨씬 넘어서는 모습으로 태어났다. 이 책은 70년대 내내 국내 소설 베스트셀러 1위에서 5위 사이를 오르내렸다.

오는 7월 31일은 이청준의 5주기가 되는 날이다. 그가 세상을 뜨던 날부터 나는, 이제 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 무엇이 있을까,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왔다. 장고(長考) 끝에, 그를 위해 ‘불혹(不惑)의 기념출판’을 준비하기로 한다. 그 첫 창작집이 나온 지 42년, 불혹의 세월을 넘긴 오늘, 세로짜기 2단 조판의 옛 판에 가깝도록 복간(復刊)하는 일은 매우 뜻깊게 생각되었다.

이런 출판행위는 그저 단순한 복고적 의미만을 갖지 않는다. 이 복간의 의미를 두고 문학평론가 김병익씨는 “이 책은 이청준 문학의 첫 얼굴로서, 사십여 권에 이르는 그의 소설세계의 밑그림을 이루며, 그의 창작정신의 근원적인 자리를 보여 준다”고 말한다.

글쓰기와 책만들기는 ‘문학’이라는 예술을 온전한 존재로 성립시키기 위한 협업(協業)이다. 40여 년 만에 새롭게 단장되는 추모(追慕) 기념판 ‘별을 보여 드립니다’는 그동안 일궈낸 이청준 문학의 성취에 어울리면서 기념비적 토대를 이룰 것을 믿는다.

<열화당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