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별아의 문학과 삶] 영신이의 편지
2013년 07월 19일(금) 00:00 가가
아파트에서 입주민들에 대한 서비스의 일환으로 제공하는 요가 강좌에 등록한지 넉 달째가 되었다. 수업은 2층 관리사무소에 딸린 다용도실에서 진행되는데, 그곳에 가려면 반드시 1층의 노인정을 지나야 한다. 요즘은 날씨가 무더워 실내가 답답한 어르신들이 관리사무소 앞뜰의 정자에 주로 나와 계신다.
어느 하루 정자 앞을 지나노라니 백발의 할머니, 할아버지들 사이에 흑발의 ‘새댁’ 한 명이 끼어 앉아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다. 나중에 보니 그 ‘새댁’은 나와 함께 요가 수업을 듣는 아주머니이다. 나이는, 아니 연세는 67세. 공식적인 ‘노인’으로 분류되는 65세를 훌쩍 넘어서고도 여전히 ‘진짜’ 노인들 사이에서는 ‘새댁’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노인정에서 일주일에 세 차례씩 점심 식사를 제공하는 자원봉사를 하는 아주머니, 아니 할머니도 얼마 전 칠순 잔치를 하신 분이다. ‘노인’이 또 다른 ‘노인’을 위해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고령화 사회라는 단어만으로 실감할 수 없었던 한국 사회의 노인 문제가 피부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한 1800년, 바야흐로 조선에 19세기가 시작되던 때의 평균 수명은 37세로 추정된다. 독일에서 실시된 인구통계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그 시대 30세의 모습은 지금의 72세와 비슷하다고 한다. 과학과 문명의 발달이 고작 200여 년 만에 인간의 삶을 두 배로 확장시킨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젊음은 너무 짧고 감당해야 할 노년의 고통은 너무 크다. 신조어로 ‘노후 난민’이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기본 생계가 어려운 노년층이 늘어났고, 2009년 통계청의 자료에 의하면 노인층의 45%가 빈곤 상태에 있다고 한다. 200여 년 전의 장수는 축복이었으나 2000년대의 장수는 차라리 공포에 가까운 것이다.
200년 전이었으면 인생을 마무리할 나이였겠으나 200년 후인 지금은 인생의 반 고비를 겨우 넘은 나이가 되어, 앞으로 남은 삶을 어떻게 꾸릴 것인가를 고민한다. 노후 대비라면 일차적으로 물질적인 부분을 떠올릴 수밖에 없지만 정신적인 부분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몸과 마음이 동시에 건강해야만 삶이 건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는 미래만큼이나 불명확하다. 더 이상 젊지 않으나 아직 늙었다고 말하기는 민망하다.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이 두렵기는 하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 움켜잡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과거의 흔적이 주름살로 새겨지기 시작한 채로 머지않은 미래를 예감하며 불안해한다. 이야말로 지금 한국 사회의 평범한 중년, 사오십 대의 모습일 것이다.
얼마 전 고등학교 2학년인 아들아이의 친구 영신이가 50세를 맞은 아빠의 생일에 보낸 편지가 학교 홈페이지 ‘학부모 게시판’에 올라왔다. 편지를 받은 당사자인 영신 아빠가 혼자 보기 아까워 공개적으로 ‘아들 자랑’을 한 것이다. 그런데 자식 자랑은 불출이라지만 진짜 자랑할 만한 편지였다.
“… (상략) … 아빠 이제 50살이네. 이제 시대가 발전해서 100살까진 살 테니까 이제 딱 반 왔다. 나는 항상 말하지만 아빠가 꿈을 찾았으면 좋겠어. 이제 우리도 다 컸으니까 아빠가 제2의 삶을 시작했으면 좋겠어. 항상 아빠 눈을 보면 뭔가 슬퍼 보이거나 우울해 보이거나 힘이 없어 보여. 그럴 때마다 난 너무 아쉬워. 아빠처럼 능력 있는 사람이 자신의 혼신의 힘을 다해 할 수 있는 꿈을 못 찾았다는 게. 하지만 아빠가 꿈을 찾아 낼 거라고 믿어. 그리고 난 정말로 아빠가 감정 표현을 하는 연습을 많이 해줬으면 좋겠어. 좋은 건 좋다, 싫으면 싫다, 행복하면 행복하다, 우울하면 우울하다고 말해줬으면 좋겠어. 아빠가 감정 표현을 잘 안 해주니까, 개인적으로 아빠가 우리 가족을 마음의 안식처로 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아쉬웠어. 그래도 날 이렇게 18년 동안 멋지게 키워 줘서 정말 고마워. 내가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엄마, 아빠고 앞으로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도 엄마, 아빠일 거야. 아빤 나에게 최고의 아빠야! 사랑해!”
18살짜리 아들이 50살의 아빠에게 바라는 것은 돈을 더 많이 벌어오라거나 잔소리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다. 인생의 반 고비에 이르러 얼마간 지치고 얼마간 무력해진 아빠에게 꿈을 가지라고, 혼신의 힘을 다해 원하는 무언가를 찾으라고 격려하는 것이었다. 언제 아이들이 이렇게 훌쩍 자랐나, 내 자식 남의 자식을 떠나 ‘우리 아이들’이 성장한 모습에 모두들 가슴이 뭉클해졌다.
조금은 진부한 말이지만 오늘, 바로 지금은 내게 남은 삶의 나날들 중에 가장 젊은 순간임이 분명하다. 꿈은 늙지 않는다. 꿈을 찾아가는 여정을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노년에 대한 불안과 공포보다는 새로운 삶에 대한 설렘과 기대로 발걸음을 이을 수 있을 것이다. 길어진 수명만큼 제2의, 제3의 삶을 꾸려갈 진정한 용기와 열정이 필요하다. 영신이의 편지 한 통이 짐짓 조로해가는 나를 따끔하게 일깨운다.
<소설가>
어느 하루 정자 앞을 지나노라니 백발의 할머니, 할아버지들 사이에 흑발의 ‘새댁’ 한 명이 끼어 앉아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다. 나중에 보니 그 ‘새댁’은 나와 함께 요가 수업을 듣는 아주머니이다. 나이는, 아니 연세는 67세. 공식적인 ‘노인’으로 분류되는 65세를 훌쩍 넘어서고도 여전히 ‘진짜’ 노인들 사이에서는 ‘새댁’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한 1800년, 바야흐로 조선에 19세기가 시작되던 때의 평균 수명은 37세로 추정된다. 독일에서 실시된 인구통계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그 시대 30세의 모습은 지금의 72세와 비슷하다고 한다. 과학과 문명의 발달이 고작 200여 년 만에 인간의 삶을 두 배로 확장시킨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미래만큼이나 불명확하다. 더 이상 젊지 않으나 아직 늙었다고 말하기는 민망하다.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이 두렵기는 하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 움켜잡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과거의 흔적이 주름살로 새겨지기 시작한 채로 머지않은 미래를 예감하며 불안해한다. 이야말로 지금 한국 사회의 평범한 중년, 사오십 대의 모습일 것이다.
얼마 전 고등학교 2학년인 아들아이의 친구 영신이가 50세를 맞은 아빠의 생일에 보낸 편지가 학교 홈페이지 ‘학부모 게시판’에 올라왔다. 편지를 받은 당사자인 영신 아빠가 혼자 보기 아까워 공개적으로 ‘아들 자랑’을 한 것이다. 그런데 자식 자랑은 불출이라지만 진짜 자랑할 만한 편지였다.
“… (상략) … 아빠 이제 50살이네. 이제 시대가 발전해서 100살까진 살 테니까 이제 딱 반 왔다. 나는 항상 말하지만 아빠가 꿈을 찾았으면 좋겠어. 이제 우리도 다 컸으니까 아빠가 제2의 삶을 시작했으면 좋겠어. 항상 아빠 눈을 보면 뭔가 슬퍼 보이거나 우울해 보이거나 힘이 없어 보여. 그럴 때마다 난 너무 아쉬워. 아빠처럼 능력 있는 사람이 자신의 혼신의 힘을 다해 할 수 있는 꿈을 못 찾았다는 게. 하지만 아빠가 꿈을 찾아 낼 거라고 믿어. 그리고 난 정말로 아빠가 감정 표현을 하는 연습을 많이 해줬으면 좋겠어. 좋은 건 좋다, 싫으면 싫다, 행복하면 행복하다, 우울하면 우울하다고 말해줬으면 좋겠어. 아빠가 감정 표현을 잘 안 해주니까, 개인적으로 아빠가 우리 가족을 마음의 안식처로 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아쉬웠어. 그래도 날 이렇게 18년 동안 멋지게 키워 줘서 정말 고마워. 내가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엄마, 아빠고 앞으로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도 엄마, 아빠일 거야. 아빤 나에게 최고의 아빠야! 사랑해!”
18살짜리 아들이 50살의 아빠에게 바라는 것은 돈을 더 많이 벌어오라거나 잔소리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다. 인생의 반 고비에 이르러 얼마간 지치고 얼마간 무력해진 아빠에게 꿈을 가지라고, 혼신의 힘을 다해 원하는 무언가를 찾으라고 격려하는 것이었다. 언제 아이들이 이렇게 훌쩍 자랐나, 내 자식 남의 자식을 떠나 ‘우리 아이들’이 성장한 모습에 모두들 가슴이 뭉클해졌다.
조금은 진부한 말이지만 오늘, 바로 지금은 내게 남은 삶의 나날들 중에 가장 젊은 순간임이 분명하다. 꿈은 늙지 않는다. 꿈을 찾아가는 여정을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노년에 대한 불안과 공포보다는 새로운 삶에 대한 설렘과 기대로 발걸음을 이을 수 있을 것이다. 길어진 수명만큼 제2의, 제3의 삶을 꾸려갈 진정한 용기와 열정이 필요하다. 영신이의 편지 한 통이 짐짓 조로해가는 나를 따끔하게 일깨운다.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