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별아의 문학과 삶] 지남력(指南力)에 대해서
2013년 06월 21일(금) 00:00 가가
계유정난의 공신으로 세조의 총애를 받고 예종 때 영의정에까지 오른 홍윤성은 ‘성종실록’ 졸기에 기록된 바대로 ‘거칠고 광망한 태도와 교만하고 제 마음대로 날뛰는 형상’을 지닌 자였다. 탐욕스럽고 오만한 자가 권력을 가지니 그 위세가 더없이 추악해 시첩과 노복을 함부로 칼로 베는가 하면 본처에게 자식이 없다고 양반가의 딸을 겁탈해 아내로 삼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실린 윤근수가 지은 수필 ‘월정만필’을 보면, 홍윤성이 대체 무슨 ‘빽’을 믿고 그리도 기세등등하게 날뛰었는가를 알 수 있다. 홍윤성이 역사를 기록하는 춘추관의 정일품 관직을 맡고 있을 때 ‘시정기(時政記)’를 보다가 자기의 죄악이 낭자하게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당연히 분이 나 펄펄 뛰었지만 역사의 기록은 임금도 함부로 고칠 수 없는 것이었으니 천하에 무도한 홍윤성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때 홍윤성은 씨근덕거리다 말고 콧방귀를 뀌며 큰소리를 쳤다.
“흥! 왜종이에 쓴 ‘강목’(주희가 지은 통감강목)도 즐겨 보지 않는데, 하물며 ‘동국통감’(성종 때 편찬한 역사책)이겠느냐? 네 멋대로 적어보아라. 누가 즐겨 동국(東國:우리나라)의 역사를 볼 것이랴!”
포악무도한 홍윤성이 든든한 ‘빽’으로 여겼던 것은 함께 손에 피를 묻혀 공범이 된 세조뿐이 아니었다. 홍윤성은 다름 아닌 세상 사람들의 ‘망각’을 믿었던 것이다. 아무리 욕하고, 비웃고, 지탄해도 세월이 흐르면 남는 것은 무엇을 해먹었다는 벼슬자리 이름과 그 지위를 이용해 알뜰히 챙긴 재물뿐이라는 예견이 홍윤성을 더욱 뻔뻔하게 만든 것이다.
후세는 역사책을 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무엇’을 했는지 대충 알지언정 ‘어떻게’ 했는지는 모를 것이다! 그것이 홍윤성의, 그리고 그의 후예인 악인들의 자신감이었다.
나는 국정교과서를 통해 대학입학학력고사 필수과목으로 ‘국사’를 배운 세대다. 물론 내가 배운 국사 교과서 속의 역사는 대개 정권의 입맛에 맞추어 부분 혹은 전체가 왜곡되거나 날조된 것이었다.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은 대통령이 실현하고 있다는 ‘한국식 민주주의’와 ‘정의사회 구현’의 구린내가 학살과 폭압의 선연한 피비린내와 뒤섞여 역겨운 악취를 풍겼다.
하지만 학력고사를 치기 위해 그나마 역사를 공부했기에, 이후 대학에 입학해 은폐되고 조작된 역사의 이면에 숨은 ‘진짜 역사’를 찾겠노라는 열망을 품을 수 있었다.
그런데 작금의 현실을 지켜보노라면 홍윤성의 큰소리가 단순한 허세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사’ 과목이 사회탐구영역의 선택과목 중 하나가 된 후 국사를 선택하는 학생들의 비율은 점차로 떨어져 2012년 수학능력평가에서는 전체 응시생의 7%만이 국사를 선택했다는 충격적인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이제 청소년들은 학교에서가 아니라 인터넷에서 역사를 배운다. 의미보다는 재미를 좇아 최소한 사실 관계조차 확인되지 않은 역사 아닌 역사를 학습한다. 역사를 읽지 않기에 역사를 모르고, 역사를 모르기에 역사를 왜곡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역사를 케케묵은 옛날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굳이 그것을 배우고 익힐 까닭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역사를 배우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삶을 위해서다.
정신기능장애의 상태와 정도를 파악하는 여러 조건 중에 지남력(指南力)이라는 항목이 있다. 지남력은 현재 자신이 놓여있는 시간과 장소, 상황이나 환경 따위를 올바로 인식하는 능력을 말하는데, 한마디로 어느 대중가요의 노랫말처럼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를 제대로 알고 있느냐는 것이다.
지금 잠에서 깨어난 것인지 막 잠들려는 것인지를 헷갈리고,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서 극장에 와 있다고 착각하고, 자식을 보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아이처럼 행동한다면 ‘지남력장애’에 해당하는 것이다. 정신의학계에서는 지남력장애의 원인으로 뇌의 생리적 기능 외에도 심한 갈등상태나 정신적 혼란상태, 그리고 지나친 무관심을 꼽는다.
역사를 모르고 사는 것은 사회적으로 지남력을 잃고 사는 일이나 진배없다. 지금이 언제이고, 여기가 어디인지 알지 못하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몰라 갈팡질팡 헤맬 수밖에 없다.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면 피리 부는 사나이를 좇아 스스로 강물로 뛰어드는 하멜른의 쥐들처럼 자멸하기 십상이다. 그리하여 역사는 반복된다는 안타까운 격언이 실현된다.
무적의 난신 홍윤성의 최후는 좀 시시하다. 그는 쉰한 살에 발에 종기를 앓다가 죽었다. 백 년의 절반을 겨우 넘겨 살기 위해 그토록 패악을 부린 인간의 어리석음이 허망하고 가소롭다. 이처럼 역사는 때로 교훈보다 위로를 주기도 한다.
〈소설가〉
“흥! 왜종이에 쓴 ‘강목’(주희가 지은 통감강목)도 즐겨 보지 않는데, 하물며 ‘동국통감’(성종 때 편찬한 역사책)이겠느냐? 네 멋대로 적어보아라. 누가 즐겨 동국(東國:우리나라)의 역사를 볼 것이랴!”
나는 국정교과서를 통해 대학입학학력고사 필수과목으로 ‘국사’를 배운 세대다. 물론 내가 배운 국사 교과서 속의 역사는 대개 정권의 입맛에 맞추어 부분 혹은 전체가 왜곡되거나 날조된 것이었다.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은 대통령이 실현하고 있다는 ‘한국식 민주주의’와 ‘정의사회 구현’의 구린내가 학살과 폭압의 선연한 피비린내와 뒤섞여 역겨운 악취를 풍겼다.
하지만 학력고사를 치기 위해 그나마 역사를 공부했기에, 이후 대학에 입학해 은폐되고 조작된 역사의 이면에 숨은 ‘진짜 역사’를 찾겠노라는 열망을 품을 수 있었다.
그런데 작금의 현실을 지켜보노라면 홍윤성의 큰소리가 단순한 허세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사’ 과목이 사회탐구영역의 선택과목 중 하나가 된 후 국사를 선택하는 학생들의 비율은 점차로 떨어져 2012년 수학능력평가에서는 전체 응시생의 7%만이 국사를 선택했다는 충격적인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이제 청소년들은 학교에서가 아니라 인터넷에서 역사를 배운다. 의미보다는 재미를 좇아 최소한 사실 관계조차 확인되지 않은 역사 아닌 역사를 학습한다. 역사를 읽지 않기에 역사를 모르고, 역사를 모르기에 역사를 왜곡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역사를 케케묵은 옛날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굳이 그것을 배우고 익힐 까닭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역사를 배우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삶을 위해서다.
정신기능장애의 상태와 정도를 파악하는 여러 조건 중에 지남력(指南力)이라는 항목이 있다. 지남력은 현재 자신이 놓여있는 시간과 장소, 상황이나 환경 따위를 올바로 인식하는 능력을 말하는데, 한마디로 어느 대중가요의 노랫말처럼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를 제대로 알고 있느냐는 것이다.
지금 잠에서 깨어난 것인지 막 잠들려는 것인지를 헷갈리고,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서 극장에 와 있다고 착각하고, 자식을 보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아이처럼 행동한다면 ‘지남력장애’에 해당하는 것이다. 정신의학계에서는 지남력장애의 원인으로 뇌의 생리적 기능 외에도 심한 갈등상태나 정신적 혼란상태, 그리고 지나친 무관심을 꼽는다.
역사를 모르고 사는 것은 사회적으로 지남력을 잃고 사는 일이나 진배없다. 지금이 언제이고, 여기가 어디인지 알지 못하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몰라 갈팡질팡 헤맬 수밖에 없다.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면 피리 부는 사나이를 좇아 스스로 강물로 뛰어드는 하멜른의 쥐들처럼 자멸하기 십상이다. 그리하여 역사는 반복된다는 안타까운 격언이 실현된다.
무적의 난신 홍윤성의 최후는 좀 시시하다. 그는 쉰한 살에 발에 종기를 앓다가 죽었다. 백 년의 절반을 겨우 넘겨 살기 위해 그토록 패악을 부린 인간의 어리석음이 허망하고 가소롭다. 이처럼 역사는 때로 교훈보다 위로를 주기도 한다.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