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환의 세상읽기] 쌍방향시대의 지방신문
2013년 04월 19일(금) 00:00 가가
독자가 미디어 사용자 되는
‘미주리안’의 기적에 답 있다
‘미주리안’의 기적에 답 있다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광주로 갔다. 당시 ‘전남일보(현 광주일보)’에 그 유명한 쌍나팔을 쓰고 계시던 그 신문사 김재희 어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분은 나이는 아버지보다 몇 살 아래지만 항렬로는 아버지의 손자뻘이었다. 나를 보더니 그분이 아버지한테 물었다.
“저놈이 공부 잘한다는 바로 그놈이요?”
분명히 내 조카뻘이라고 들었는데 나이가 어리다고 나를 가리켜 이놈 저놈 하는 게 조금 걸렸다. 아버지께서는 나더러 저만큼 가 있으라고 했다. 나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섰지만 두 분이 나누는 이야기는 고스란히 다 들렸다. 아버지가 말했다.
“애가 광주에서 자라게 했으면 하는데 저놈한테 소사라도 맡겨보게.”
김재희 족장의 답은 간명했다.
“차라리 애를 굶겨 죽이시오. 장남한테 소사 질을 시킨다는 게 말이 되오?”
아버지는 나를 사동으로 밀어 넣어 야간학교라도 다니게 할 요량이었지만, 족장은 사내아이를 사동으로 길들게 해서는 안 된다며 단호하게 퇴짜를 놓았다.
그 뒤 나는 고향에서 매일 삼십 리를 걸어 중학교에 다녔다. 그것도 자풋재를 넘는 산길이어서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여름철이면 발이 퉁퉁 부어 운동화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다짐했다. 학교는 이것으로 마감한다. 중학교만 마치면 나는 결코 학교 근처에도 가지 않으리라.
중학교를 졸업한 뒤에 나는 장흥향교의 전교를 맡고 계시던 고숙(姑叔)이 운영하는 서당으로 가 한문을 배웠다. 그러던 나에게 어느 날 아버지가 찾아오셨다. 나더러 사범학교 시험을 보라는 것이었다. 원서 마감이 임박한 시점이었다. 그 시절에 사범학교 입시에 붙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웠다. 특히 걸어다니는 데 송신이 나서 진학을 포기하고 한문 공부를 하고 있던 나에게 그 시험을 보라는 건, 가서 죽으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내키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광주 친척집으로 가서 입시에 응했다. 옆집에 살던 학생 하나가 문제집을 건네주었다. 시험은 사지선택의 객관식이었다. 나는 그런 객관식 답안지를 전에 본 적이 없었다. 어느 과목인가 답을 다 표시했는데 한 칸이 남았다. 한 문제를 빼고 답을 표시한 것이었다. 어느 문제를 빠트렸는지 찾는 동안에 종이 울렸다. 나는 보기 좋게 낙방했고 나에게 문제집을 빌려준 학생은 수석 합격했다. 친척 아주머니는 몹시 속이 상했는지 옆집 아들놈은 일등으로 붙었는데 너는 꼴찌 합격도 못했으냐고 다그쳤다.
그 뒤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나는 고려대 신문방송학과에 들어가 언론학을 공부했고, 1981년 이후에는 광주로 내려와 전남대 신문방송학과의 교수가 되었다. 부임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전남일보’를 찾았다. 김재희 족장이 이끌어주었더라면 인연을 맺었을 수도 있는 그 신문에서 나는 뜻밖에도 수년 전에 나에게 문제집을 빌려준 학생을 만났다. 조동수였다. 김재희와 조동수. ‘전남일보’의 명 주필로 지역 여론을 이끌고 대변하던 올곧은 언론인들이었다.
지금은 ‘광주일보’로 이름을 바꾼 바로 그 ‘전남일보’가 창간 61주년을 맞이했다. 참으로 경하할 일이지만 마음 한 자락에 깔린 어둠을 숨길 수는 없다. 지방신문의 경영여건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나타나 공짜로 정보를 퍼트리는 바람에 신문은 경영기반 자체가 허물어졌다. 거기다가 민주화 후과(後果)로 신문이 난립해 좁은 시장에서 너 죽고 나도 죽는 죽음의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지방신문에 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최근 미국에서 ‘미주리안(Missourian)’이라는 신문이 보여준 기적에서 그 길을 엿볼 수 있다. 인터넷시대에 독자들이 인터넷신문에서 정보를 공짜로 얻으면서 기사나 논설에 열심히 댓글을 다는 것을 보고 그 신문은 인터넷판을 활짝 열어 독자의 참여를 부추겼다. 인터넷 판에 괜찮은 의견이 올라오면 종이신문에서 소개하고 때로는 파격적으로 대서특필했다. 댓글이나 의견을 올린 익명의 독자들 가운데 일부는 본인의 동의를 얻어 실명을 밝히고 종이신문에 소개했다. 댓글이 많이 달린 기사는 보완취재를 통해 종이신문에서 크게 다루었다.
독자의 참여욕구를 수용하는 이런 간단한 전략만으로 ‘미주리안’은 2만 부 이상의 유료독자를 창출했다. 신문이 갑이 되고 독자는 을이 되는 시대가 아닌, 서로 갑이 되고 을이 되는 쌍방향시대에는 종이신문도 쌍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답을 ‘미주리안’이 제시한 셈이다. ‘미주리안’ 사람들은 소리치고 있다. 쌍방향 시대에 쌍방향으로 가기 쉬운 지방지여서 천만다행이라고.
이 순간에도 많은 기자들이 ‘광주일보’에서 제2, 제3의 김재희 조동수가 되어 지방의 언론문화를 일구고 있다. 독자가 수용자도 소비자도 아닌, 미디어 사용자로 변한 새로운 환경에서 제2, 제3의 김재희 조동수들이 독자의 의견을 듣고 독자를 모시는 쌍나팔을 분다면 독자들 역시 쌍나팔로 호응할 것이다. ‘미주리안’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고려대 명예교수〉
“저놈이 공부 잘한다는 바로 그놈이요?”
“애가 광주에서 자라게 했으면 하는데 저놈한테 소사라도 맡겨보게.”
김재희 족장의 답은 간명했다.
“차라리 애를 굶겨 죽이시오. 장남한테 소사 질을 시킨다는 게 말이 되오?”
아버지는 나를 사동으로 밀어 넣어 야간학교라도 다니게 할 요량이었지만, 족장은 사내아이를 사동으로 길들게 해서는 안 된다며 단호하게 퇴짜를 놓았다.
그 뒤 나는 고향에서 매일 삼십 리를 걸어 중학교에 다녔다. 그것도 자풋재를 넘는 산길이어서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여름철이면 발이 퉁퉁 부어 운동화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다짐했다. 학교는 이것으로 마감한다. 중학교만 마치면 나는 결코 학교 근처에도 가지 않으리라.
그 뒤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나는 고려대 신문방송학과에 들어가 언론학을 공부했고, 1981년 이후에는 광주로 내려와 전남대 신문방송학과의 교수가 되었다. 부임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전남일보’를 찾았다. 김재희 족장이 이끌어주었더라면 인연을 맺었을 수도 있는 그 신문에서 나는 뜻밖에도 수년 전에 나에게 문제집을 빌려준 학생을 만났다. 조동수였다. 김재희와 조동수. ‘전남일보’의 명 주필로 지역 여론을 이끌고 대변하던 올곧은 언론인들이었다.
지금은 ‘광주일보’로 이름을 바꾼 바로 그 ‘전남일보’가 창간 61주년을 맞이했다. 참으로 경하할 일이지만 마음 한 자락에 깔린 어둠을 숨길 수는 없다. 지방신문의 경영여건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나타나 공짜로 정보를 퍼트리는 바람에 신문은 경영기반 자체가 허물어졌다. 거기다가 민주화 후과(後果)로 신문이 난립해 좁은 시장에서 너 죽고 나도 죽는 죽음의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지방신문에 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최근 미국에서 ‘미주리안(Missourian)’이라는 신문이 보여준 기적에서 그 길을 엿볼 수 있다. 인터넷시대에 독자들이 인터넷신문에서 정보를 공짜로 얻으면서 기사나 논설에 열심히 댓글을 다는 것을 보고 그 신문은 인터넷판을 활짝 열어 독자의 참여를 부추겼다. 인터넷 판에 괜찮은 의견이 올라오면 종이신문에서 소개하고 때로는 파격적으로 대서특필했다. 댓글이나 의견을 올린 익명의 독자들 가운데 일부는 본인의 동의를 얻어 실명을 밝히고 종이신문에 소개했다. 댓글이 많이 달린 기사는 보완취재를 통해 종이신문에서 크게 다루었다.
독자의 참여욕구를 수용하는 이런 간단한 전략만으로 ‘미주리안’은 2만 부 이상의 유료독자를 창출했다. 신문이 갑이 되고 독자는 을이 되는 시대가 아닌, 서로 갑이 되고 을이 되는 쌍방향시대에는 종이신문도 쌍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답을 ‘미주리안’이 제시한 셈이다. ‘미주리안’ 사람들은 소리치고 있다. 쌍방향 시대에 쌍방향으로 가기 쉬운 지방지여서 천만다행이라고.
이 순간에도 많은 기자들이 ‘광주일보’에서 제2, 제3의 김재희 조동수가 되어 지방의 언론문화를 일구고 있다. 독자가 수용자도 소비자도 아닌, 미디어 사용자로 변한 새로운 환경에서 제2, 제3의 김재희 조동수들이 독자의 의견을 듣고 독자를 모시는 쌍나팔을 분다면 독자들 역시 쌍나팔로 호응할 것이다. ‘미주리안’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고려대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