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며칠 앞두고 오랜만에 밤을 새워가며 소설을 읽었다. 일본 작가 히가시노 게고(東野圭吾)의 ‘편지(手紙)’라는 소설이다. 히가시노 게고는 한국에서도 그의 작품이 여러 편 번역돼 소개되었다.

언젠가 일본 출장에서 돌아오다가 하네다공항에서 시간을 때울 요령으로 집어 들었던 문고판 책이다. 책의 제목에 끌려서 사게 되었는데, 세밑에 책장을 정리하다 보니 튀어나왔다.

소설의 내용은 대충 이러하다. 부모 없이 어렵게 살아가던 형제가 있었다. 어느 날 형이 동생의 대학 진학에 필요한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도둑질을 하다가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결국 형은 강도살인죄로 복역하게 된다.

혼자 남은 동생은 흉악한 범죄자의 동생이라는 낙인이 더해져서 사회적으로 거듭되는 좌절과 차별을 겪게 된다. 그 동안, 교도소에 수감된 형과 바깥세상에서 힘들게 살아가던 동생은 많은 편지를 주고받는다. 동생에 대한 형의 미안한 마음, 형에 대한 동생의 애증의 감정이 편지를 통하여 서로에게 전달된다.

얼핏 보면 진부한 내용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에는 시간과 공간을 건너뛰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 무언가가 담겨있다. 그 무언가 때문에 쉰 살이 넘은 나도 밤을 새워가며 이 소설을 읽었으리라. 실은 내가 좀처럼 책을 덮을 수 없었던 이유는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편지’ 때문이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주변에서 편지가 사라졌다. 해마다 이맘때면 주고받던 연하장마저도 급속도로 사라져가고 있다. 물론 이는 인터넷의 보급에 따른 결과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세대만 해도 살아오면서 많은 편지를 썼다. 편지와 관련된 추억 또한 적지 않다. 연필심에 침을 묻혀가며 꾹꾹 눌러쓰던 국군아저씨께 드리는 위문편지, 꽃잎이나 네잎 클로버가 첨부된 연애편지, 친구에게 잘못을 사과하던 사과의 편지, ‘아버님 전상서’로 시작되는 돈 부쳐달라는 편지 등등.

요즈음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편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툴(communication tool)이었다.

몇 년 전부터 우리 사회에서 소통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특히 올해는 연초부터 유독 ‘소통과 공감’이라는 말이 각종 매스컴을 떠돌아다닌다. 가정에서 가족끼리의 소통, 친구 및 연인 사이의 소통, 직장에서 동료 사이의 소통, 사회적 이슈와 관련하여 생각이 다른 사람끼리의 소통, 그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요즈음처럼 사회가 다원화되고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될수록 소통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런데 소통이 유난히 강조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 곳곳에서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휴대폰을 비롯하여 빠르고 편리한 각종 커뮤니케이션 툴이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소통의 필요성이 유난히 강조되고 있으니, 조금은 역설적이기도 하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수 있다. 첨단 커뮤니케이션 툴의 발달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정한 마음의 소통을 방해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마음의 소통이 필요한 현대사회에서 새삼 편지의 소중함을 생각해본다. 부부싸움 후에 배우자에게 슬쩍 건네는 편지, 자식을 야단친 후에 부모가 쓰는 편지, 멀리 떨어져 사는 친지에게 보내는 새해 인사 편지, 직장 동료에게 보내는 화해의 편지는 상대방에게 기대 이상의 감동을 줄 수도 있다. 총선과 대통령 선거를 앞둔 ‘정치의 해’인 올해에는 입후보자들에게 보내는 격려의 편지, 혹은 ‘똑바로 하라’고 일침을 가하는 편지도 좋을성 싶다.

편지는 마음의 울림이다. 상대방에 대한 그리움이나 배려 이전에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느림의 미학을 느낄 수 있는 참선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 울림이 크면 클수록, 그리고 그 참선이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상대방에게 전해지는 감동도 클 것이다.

복잡다단한 이 시대에 정서적 소통, 사회적 소통, 정치적 소통을 위해서 올해는 편지를 쓰자. 새해 첫날, 내 스스로의 다짐이다.

<김용희 전남대 일어일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