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면 공연물이 넘친다. 지역의 공연 뿐만 아니라 유명 뮤지컬이나 콘서트도 전국투어공연으로 광주를 찾는다. 부지런히 발품을 팔면서 공연을 보는데, 보면 볼수록 자꾸 미궁 속으로 빠지는 느낌이다. 그러면서 지난해 여름 한 철 땀흘리며 읽었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두 부분이 자꾸 떠오른다.

니체는 정신의 자기변화를 3단계로 설명한다. 낙타에서 사자로, 그리고 마지막 단계로서 어린아이의 정신을 든다. ‘낙타’로 비유되는 정신은 아무런 반성없이 일체의 사회적 관습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정신이다. 마치 낙타가 무릎을 꿇고 짐이 가득 실리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지역 공연단체의 작품을 보면서 자꾸 이 낙타의 이미지가 오버랩되는 것은 어떤 연유일까. 사자의 정신처럼 자유정신의 쟁취나 어린아이의 정신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가치의 창조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

지난날의 굳은 습관을 답습하는 단계인 낙타의 정신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과거의 공연이나 지금의 공연이나 차별성이 없다는 데에서 비롯된다. 감동과 예술혼이 실리지 않은 공연이거나 출연진들의 몸짓 하나, 눈빛 하나에서도 프로정신을 느끼기 어렵다. 대본, 무대 연출, 안무, 조명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유료관객을 확보한다는 것은 요행을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혹자는 시립예술단 공연때 문예회관 대극장의 텅빈 초대석을 예로 들면서 지역 오피니언 리더들의 책임론을 거론한다.

또는 객관적 비평문화가 사라지고 학연으로 얽힌 온정주의만 남은 우물안 개구리식 공연환경이 경쟁력을 실종시킨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물론 공연단체의 입장에서 보면 열악한 예산지원이나 전문인력 부재를 탓할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이유를 붙이더라도 공연의 책임은 제작스텝과 출연진에 있다. 요즈음 ‘국악계의 프리마돈나’라는 별칭으로 상종가를 올리고 있는 박애리의 경우를 보면 예술가는 어떻게 단련되는가를 엿볼 수 있다.

목포 출신 박애리는 국립창극단에서 안숙선 이후 30년만에 배출된 ‘여자 명창’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녀는 1999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할때만 해도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성실함과 끈질긴 노력을 통해 서서히 실력을 인정받게 된다.

하루에 무려 100가지 이상의 지적사항을 꼼꼼히 메모하면서 밤낮없이 연습에 몰두했다고 한다. 소리공부 뿐만 아니라 연기와 무용까지 넘나들면서 만능 멀티플레이어로 성장했다. 마침내 2001년 국립극장 최초의 총체극 ‘우루왕’에서 주인공인 바리공주역을 꿰차게 되고 세계 순회공연을 통해 진가를 더욱 드러냈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국악과 비보이의 만남이자 전통과 현대의 만남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 중이다.

오늘날 현존하는 독보적 경영저술가로 평가받는 말콤 글래드웰은 자기 분야에서 최소한 1만 시간동안 노력한다면 누구나 정상에 오를 수 있다고 말한다. 1만 시간은 매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3시간씩 연습한다고 했을 때 10년을 투자해야 하는 긴 시간이다.

그러나 오늘날 정상에 오른 사람들은 이 ‘1만 시간의 법칙’을 우직하게 실천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예술인이 매너리즘에 빠져 치열함을 상실할 때 그 결과는 치명적이다. 공연은 피나는 노력과 성찰을 한 자만이 정상에 설 수 있다.

마침 지역 연극계의 오랜 숙원이었던 시립극단 재창단을 눈앞에 두고 있다. 시립극단은 1983년에 지역극단으로서는 전국 최초로 창단되었지만 내분으로 인해 5년만에 해체되었다. 단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이후 광주연극계는 침체의 늪에 빠지게 된다. 문화수도를 자처하는 예향의 도시에 시립극단 없는 부끄러운 상황이 23년 동안 지속된 셈이다.

그러나 이제 다시 기회가 왔다. 시립극단 재창단은 명성 높았던 광주연극의 자존심의 부활이자 빈약한 광주공연을 되살릴 무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부활의 바탕에 니체가 말한 ‘낙타의 정신’이 깔려있다면 기회는 다시 위기가 될 것이다. 어느 쪽이 될 것인가는 온전히 광주연극인들의 몫이다.

〈박선정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