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두 권의 책을 가까이에 두고 있다. 한 권은 아침에 그림을 그리려는 준비를 마치고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읽는 책이고, 한 권은 작업실에서 무더움으로 지쳐갈 무렵 고즈넉한 저녁노을이 창가에 하나 둘 찾아올 때 읽는 책이다.

아침을 맞이할 때 읽는 책은 일본의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라는 산문집이다. 마루야마 겐지는 1945년 나가노현 이에야마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본 현대 문학의 ‘작가정신’으로 불릴 정도로 가혹하리만큼 소설쓰기에만 전념하는 일본 문학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소설가다.

1966년 ‘여름의 흐름’으로 문학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고 이듬해 같은 작품으로 일본의 대표적인 문학상인 아쿠타가와 상을 최연소로 수상했다.

그는 소설을 쓰기 전에는 통신사에서 전문을 발신하고 수신하는 일을 하였다. 이런 경험이 일본문학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으면서 일본 문학에서 가장 특출한 작가로 평가받는 바탕이 된 것 같다.

데뷔 직후 일본 북알프스 기슭의 오지 마을로 들어간 그는 그 때부터 문단과 여타 인간관계를 단절한 채 글쓰기만 전념하여 오직 원고료 수입만으로 수도승같은 고독의 소설쓰기만 평생 전념하였다.

이 산문집에서는 무서울 정도로 가혹한 소설가의 정신과 예술가의 자세를 만날 수 있어 무언가 쫒기면서 작업하고 살아가는 필자에게 얼음 같은 비수를 들이댔다.

저녁 무렵에 읽는 또 한 권의 책은 ‘포구기행’ 이후 오랜만에 책을 낸 곽재구 시인의 ‘우리가 사랑하는 1초들’이라는 산문집이다. 시인이 일년 반 동안 인도 시성(詩聖) 타고르의 고향인 산티니케탄에 살면서 그 곳에서 보고 느낀 것 가난한 인도의 이웃과 풍경들을 깊은 서정적 문체로 일기처럼 써내려간 산문집이다.

뱅골어를 익혀 아름다운 타고르의 시를 한국어로 번역하고 싶어 인도로 간 시인은 처음 몇 달 동안 풍토병에 걸려 죽음같은 고통 속에서도 그 곳을 떠나지 않고 견디며 산티니케탄에 융화되어 가난한 빈자들의 영혼들을 아름다운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저녁 무렵에 이 산문집을 읽으면 지쳐버린 영혼을 고요하게 어루만져주는 힘이 있어 마음의 평안을 찾는다.

아침저녁으로 읽는 이 두 권의 산문집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먼저, 그들의 예술이 고통이라는 토양에서 창작되었다는 것이다. 마루야마 겐지는 24시간 소설을 생각하는 작가로, 적당히 삶을 즐기다 적당히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닌 감옥 같은 철장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철저한 고독 속에서 최소한의 생활비로 생활하며 빈자의 삶으로 소설가의 생을 살고 있는 작가이다. 곽재구 시인도 산문집에서 인도 산티니케탄의 지극히 가난한 삶을 세상에서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눈으로 바라보며 그들의 삶과 융화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면에서 요즘 우리들의 삶을 보면 ‘버림’이라는 고통을 통해서 ‘채움’으로 가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삶의 방식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없음’과 ‘버림’을 배우지 않고 오로지 ‘얻음’과 ‘채움’만을 추구하는 것이 정말 고통으로 가는 길임을 모르고 아둥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기후재앙과 경제적 혼란도 그 근본에는 극한적인 인간의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넘어지지 않고 샘이 깊은 물은 쉽게 마르지 않는 법이다. 거치른 들녘에 수많은 세월을 견디어 낸 야생화와 온실 속에서 자란 화려한 꽃들이 어찌 그 생명력을 비교할 수 있을 것인가.

요즘처럼 일류만을 지향하고 극한적인 경쟁 속에서 인간성을 상실한 채 배려하는 마음을 잃고 온실 속에서만 자란 나 혼자만의 나약한 정신으로는 급변하는 격랑의 세계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는 고통의 아름다움을 어린 시절부터 체득해야만 한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그늘이 얼마나 크고 거친 바람 속에 피는 들녘의 야생화는 그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가. 고통의 아름다움을 다시 찾아야하는 시대가 바로 오늘인 것 같다.

〈한희원 서양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