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나. 오월이 오면 광주의 거리는 이팝나무의 눈부시게 하얀 꽃잎이 거리에 피어났다. 봄날 작은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꽃잎은 은빛 눈물이 되어 사람들 가슴 위에 내려앉았다. 망월묘역으로 가는 길에 핀 이팝나무의 하얀 꽃잎도 어느덧 꿈이 되고 평화가 되고 그리움이 되어 오월의 꽃으로 피어 있다.

80년대에는 오동꽃이 한참 피었다. 지금도 보랏빛 오동꽃은 곳곳에 피어 있는데 그 꽃을 보고 있으면 하늘을 향해 하나같이 일어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린 보랏빛 꽃잎이 기립하여 서 있는 모습은 마치 민주와 자유, 그리고 평화를 노래하는 민초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뜨거움이 가슴을 치고 오른다.

나는 가끔 이팝나무의 눈부신 하얀색과 오동꽃의 보라색을 화폭에 섞으면 어떤 색이 될까 상상해 보았다. 아마 자식을 먼저 보내고 가슴을 열어 보면 검게 타다 이제는 한 핏줄도 보이지 않는 어머니의 한과 그리움의 색이리라 생각해 보았다.

며칠 전 예술의 거리를 걷다 들른 전시장에서 가슴이 울컥해진 적이 있었다. 광주가 아닌 타지역 출신인 김은주라는 사진작가 작품이었는데, 오월 어머니들이 아픈 한을 남긴 장소에서 찍은 사진을 모은 전시회였다.

사랑하는 자식과 남편을 보내고 다시는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그곳을 배경으로 서있는 어머니들의 모습은 나도 모르게 눈시울을 지게 하였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는 저항, 평화, 인권의 모든 단어를 함축시킨 절절한 한의 노래였다.

나는 이러한 오월의 문화가 광주 출신이 아닌 타지역 작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세계적으로 저항, 자유, 인권, 평화의 역사를 상징하는 시민운동으로 기록되었으나 이 정신을 계승 확산하고 그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이제는 작품을 통한 감동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라 생각된다.

20세기 유럽의 전쟁과 파괴의 시대에서 저항과 자유, 평화를 꿈꾸고 기록했던 화가 파블로 피카소와 시인 폴 엘뤼아르는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상징이 될 수 있다 하겠다.

“내 학생 때의 공책 위에/ 내 작은 책상과 나무들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쓴다 그대 이름을/ 내가 읽은 모든 페이지 위에/ 모든 백지 위에/ 돌과 피와 종이, 또는 재 위에/ 나는 쓴다 너의 이름을” 이라고 자유를 노래했던 폴 엘뤼아르의 시를 보자.

또 1936년 스페인 내란 발발 당시 인간의 파괴와 전쟁의 비참함을 그린 피카소의 ‘게르니카’라는 작품은 예술가의 작품이 역사적 진실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적으로 전해주는가를 볼 수 있다.

‘게르니카’라는 작품을 통해 게르니카에서 일어난 일들을 잊지않고 기억하는 것처럼 80년 5월의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주의에 대한 항거와 시민공동체 대동정신은 위대한 작품으로 승화되어 영원히 남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까지 30여년 간 방치되었던 작품들을 더 이상 손상되고 잊혀 지기 전에 한 곳으로 모아 전시 보존하는 공간이 절실히 필요하다 하겠다. 시민들도 뭉크의 ‘절규’를 사랑하는 노르웨이 시민들처럼 절규하는 시대의 아픈 그림들도 느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시민과 함께하지 않는 문화는 공허하기 때문이다.

30년 전부터 이러한 작업을 해왔으면 지금 쯤 세계적인 인권, 자유, 평화를 상징하는 미술관 하나쯤은 있을 법한데 세계적 비엔날레가 열리는 미술의 도시에 이러한 미술관이 없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올해도 광주에서는 5월 관련 문화 행사가 진행됐다. 새롭게 시도된 평화 연극제, 80년 당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직접 노래한 이들이 참여한 광주시립국악관혁악단 공연, 뮤지컬 ‘화려한 휴가’ 등. 이러한 작품들이 해마다 더욱 견고하게 창작되어 그것이 감동으로 남는 작품이 되길 기대해본다. 그것이 광주정신을 세계인에게 보여주는 길이 될 것이다. 피카소의 ‘게르니카’처럼….

〈한희원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