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봄이 왔다.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던 지난 겨울이 가고 초봄, 그 싱그러운 푸르름이 대지를 물들인다. 요즘 돌아가는 세상의 일들이 우리를 힘들게 하여도 자연의 시간은 그대로 흘러 또다시 봄은 오고 세월은 강처럼 흘러 겹겹이 쌓인다.

아침 신문에서 세기의 미녀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중학교 시절이었나.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몽고메리 크리프트가 주연했던 ‘젊은이의 양지’라는 영화를 보고 며칠간 가슴앓이를 했던 기억이 난다.

시골에서 상경한 가난한 청년과 재벌가의 아름다운 아가씨 사이에 절망적이고 비극적인 사랑을 다룬 이 영화는 1950년대 암울했던 미국사회 젊은이의 이야기로 깊은 방황과 절망, 공허가 깃든 배우들의 눈망울이 화면 전체에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금융파동부터 젊은이의 처지와 겹쳐지며 다시 한번 미인의 죽음과 함께 흐릿한 상념으로 빠져들게 했다.

지난 몇해 전 우리는 소중한 분들을 떠나보내야 했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 박경리·박완서 선생님 등. 답답하기만 한 남북문제나 어려운 난제로 나라가 혼란스럽고 자연 재앙으로 온 세계가 요동칠 때 소중한 지혜로 우리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제시한 분들의 빈자리가 요즘처럼 안타깝게 느껴지던 때가 없었던 것 같다.

이런 세월 속에서도 매서운 겨울바람을 뚫고 섬진강변엔 매화가 피고 산수유가 피었다. 조금 있으면 백련사의 동백꽃이 피고 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올 것이다. 섬진강변 산자락에 자리 잡은 매화는 안개가 자욱한 날에 더욱 절경이다. 매화와 안개 사이에서 길을 잃고 방황할 즈음에야 봄의 시간 속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꽃에 취해 강을 찾고 길을 걷는다.

그렇지만, 이번 봄에 꽃을 만나러 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마냥 행복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이웃나라 일본의 지진과 방사선 피해 공포, 그리고 겨우내 구제역으로 죽어가 아무렇게나 파묻힌 수백만 가축들의 울음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기 때문이다. 또 아랍권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주화의 열망으로 죽어가고 있는 시민들의 소식은 같은 아픔을 겪은 우리들로서는 펑펑 꽃망울 터지는 봄 소식에 마냥 행복해 할 수만은 없는 것 같다.

지난 25일 찾았던 가수 나윤선의 광주 공연에서 반주를 맡을 예정이었던 프랑스 뮤지션이 한국도 일본 방사능 피해가 예상돼 가족들의 만류로 한국에 올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이제는 남의 나라 일이 그 나라의 일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몇 년 전 뉴욕에서 일어난 금융파동부터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면 어떤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이제는 세계가 하나의 톱니바퀴처럼 연결되어 있어 한쪽이 잘못되면 전체가 파멸된다는 것이고, 파멸의 근본적인 요인에는 인간의 끝없는 탐욕이 있다는 것이다.

불의 시대, 석기시대, 청동기시대를 거쳐 석유와 원자력시대까지 인간들의 거침없는 탐욕이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의 아름다운 심성을 잃게 하여 역으로 그 고통이 이제는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넘겨지는 비극을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몇해 전 뉴욕에서 열리는 아트페어 참석차 그곳에 도착했을 때 허드슨강 너머로 보이는 마천루의 모습은 인간이 만들어낸 거대한 히말라야 산맥처럼 보여 아름다움과 함께 두려움이 느껴졌다. 마치 자본의 힘이 신의 자리에 앉아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는 것처럼.

이러한 시대에 예술가의 역할은 무엇일까. 잘 팔리는 문화마케팅도 중요 하지만 근본적인 인간성과 자연을 회복하는 메시지를 예술을 통해 전달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어느 문호의,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하리라’는 말처럼 자본의 추구만이 최상의 법칙이 아닌, 인간과 자연의 근원성을 회복하는 일이 세상을 변화하고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봄날에 진정한 행복을 유지하는 것에 대하여 지구인 모두가 고민해야 할 시기가 바로 지금인 것 같다. 그래야 봄을 봄 답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희원 서양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