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사람이 다 아는데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합니까?”

법정에서 심심찮게 접할 수 있는 장면이다. 재판장이 증거를 대라고 촉구하면 이와 같이 답변하는 소송 당사자들이 많다. 판사가 모든 사정을 다 알 것이라거나,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잘 헤아려 옳게 판단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한다. 마치 행정기관에 민원을 제기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의 증거를 대지 못한다면 그 소송 당사자는 패소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그 패소 당사자는 담당 판사에 대해 ‘이상한 판사’라거나 심한 경우 ‘판사가 반대 당사자 쪽의 뇌물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라고 여기기도 한다. 더 나아가 1인 시위는 물론, 패소한 사람들끼리 모여 법원을 비방하는 단체활동을 하기도 한다.

판사가 전지전능한 신도 아니고, 소송당사자와 함께 그 사건의 현장을 쭉 지켜보았던 것도 아니며, 타임머신을 타고 당시 그 장소로 가볼 수도 없다. 따라서 소송당사자의 기대와는 달리 그가 제출한 증거에 따라 그 주장의 진실성을 가릴 수밖에 없다. 즉 현대 재판은 철저한 증거재판주의 원칙 아래 진행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소송절차에서의 사실인정은 적법한 조사절차를 거친 증거에 의하여야 한다. 이는 사실인정에 있어서 법관의 자의적인 판단을 배제하고 객관성과 합리성을 담보하려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과거의 이른바 ‘원님재판’ 당시에는 이러한 원칙이 확실하지도 않았고, 행정기관과 사법기관이 분리되지도 않아 원님의 심증에 따라 소송의 승패나 유무죄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원님재판에서는 증거가 없어도 억울한 사람을 구제해줄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변 학도 같은 탐관오리가 자의적인 판단으로 국민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도 있을 수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반성의 산물이 바로 증거재판주의인 것이다.

“이쪽 말도 맞는 것 같고, 저쪽 말도 맞는 것 같을 때 참 고민이 많겠다.” 필자가 법관으로 재직할 당시 지인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의 하나다. 소위 증명책임의 문제이다.

법관이 문제가 된 사실의 존재 여부에 관해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경우 재판이 여의치 않다. 그렇다고 해서 법원이 그 사실의 존재 여부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재판을 거부할 수는 없다. 이 경우 그 사실의 존부불명의 불이익을 어느 한쪽의 당사자에게 돌리는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문제가 된 사실의 존부불명의 경우에 법관으로 하여금 재판을 가능하게 하는 보조수단이 곧 증명책임이고, 이는 민사소송법이나 형사소송법 등에 규정돼 있다.

민사·가사·행정 재판에서는 증명책임이 대부분 원고에게 있다. 예컨대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한 원고로서는 피고가 원고에게 손해를 끼쳤다는 사실과 그 손해액을 증명해야 한다. 이를 증명하지 못하거나 증명하더라도 그 증명의 정도가 충분하지 않을 경우 법원은 원고가 피고로부터 손해를 입지 않은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원고 패소판결을 선고하게 되는 것이다.

형사재판에서는 유죄의 증명책임이 검사에게 있다. 그리고 그 증명의 정도는 그 중요성에 비추어 다른 재판보다 높은 수준을 요구한다. 예컨대 절도 피고인이 절도 사실을 부인하는 경우 검사가 이를 증명해야 한다. 이를 증명하지 못하거나 증명하더라도 그 증명의 정도가 충분하지 않을 경우 법원은 피고인이 절도죄를 범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피고인에게 무죄판결을 선고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실이 진실이고, 동네 사람이 다 알고 있다 하더라도 증거를 대지 못하면 원고 청구가 기각되거나 무죄판결이 선고될 수밖에 없다. 바꿔 말하면 원고 청구가 기각됐다고 해서 원고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라, 원고가 증거를 대지 못하였다는 의미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마찬가지로 무죄판결이 선고됐다 하여 그 피고인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유죄의 증거가 부족하다는 의미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사법불신의 원인 중 상당 부분은 이와 같은 증거재판주의 내지 증명책임의 원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주장하는 사실이 분명히 맞는데도 부패하거나 무능한 판사가 패소판결을 선고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신문에 사건화된 그 공무원이 분명히 뇌물을 받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판사가 그 공무원이나 변호인의 편을 들어 무죄판결을 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국민 대다수가 이와 같은 증거재판주의 내지 증명책임의 원칙을 이해하기에는 우리 현대 사법의 역사가 아직은 짧은 것 같다. 고등교육을 받은 지성인들도 법원에서 검사실을 찾는다든가 법무부장관이 법관에 대한 인사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너무나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구길선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