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젊은 날의 광주에는 그 어른들이 있었다. 홍남순 변호사님과 조아라 여사님. 그 시절의 전남여고 정문 앞 큰길 건너편에는 홍 변호사님의 안집 겸 변호사 사무실이 있었고, 금남로의 광주일보사(당시엔 전남일보사) 뒤편에는 조아라 여사님이 회장으로 일하는 광주YWCA 건물이 있었는데, 지금도 내 눈에는 그곳의 길들과 옛집들이 손에 잡힐 듯 눈에 선하다. 그때 나는 광주중앙여고 교사로서 학교수업이 끝나고 별다른 일이 없을 때는 대게 홍 변호사님의 사무실에 들러서 그분의 말씀을 듣는다든지, 아니면 광주YWCA에 가서 조 여사님을 만나 뵙는 것을 즐겼다. 아마 그래서였을까? 그 두 어른들은 마치 나를 자식처럼 대하였으며, 나 역시도 어쩌면 그분들이 부모님과 같다고 여겼으니까.

그분과 교분을 가졌던 이들은 다 알다시피 홍 변호사님은 성격이 워낙 후덕하신지라, 아무리 나이 어린 사람이 만나러 와도 조금도 싫어하는 내색이 없이 부드럽고 친절하게 맞아주셨으며, 온화한 말씀으로 좌중을 이끄심으로, 그분과 함께 앉은 곳이라면 모두들 쉽게 자리를 뜰 줄 모를 정도였다. 그런지라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라면 무슨 이야기이건 상관하지 않고 한 마디도 빠짐없이 듣고 싶어서 서로 무릎을 앞당기면서 귀를 기울였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그분이 당시의 암울한 정치현실을 개탄하면서 나라 꼴을 염려할 적에는 너나없이 주먹을 쥐고 제 가슴을 치지 않았던가.

그럴 때면 그분은 분명히 피 뜨거운 젊은이들의 좌장어른이었으며,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의 선동가였고, 변방의 슬픈 지성들에게는 희망을 주는 인도자였다. 그리고 그가 이것저것 탄식을 섞어가며 풀어놓는 말씀들은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참된 교과서였고 나침반이었다. 아아, 그 엄혹한 시절에 광주사회에서 어느 누가 그분처럼 여러 사람 앞에서 불의한 정권을 비판하고 그 하수인들을 매도하며 세상의 모순을 두려움 없이 지적할 수 있었던가. 비록 그 자리가 길거리의 군중 속이 아닐지라도, 때로는 시를 읊듯이 때로는 변론을 하듯이 말하는 그분이 그곳 광주에 살아 있어서 나는 행복했다.

또한 조아라 여사님은 어떻고? 비록 겉모습은 엄하게 보일지라도 가슴은 비단결 같이 곱던 그 어른. 어느 때는 자상한 시골 할머니처럼 나에게 이것저것을 잘 챙겨 주시다가도 조금이라도 빈틈이 보일라치면 호되게 나무라시던 그분. 세상과는 함부로 타협하지 않고 당찬 가슴으로 올곧은 생각과 일을 밀어붙이는 그분의 광주YWCA는 언제나 새롭고 활기가 넘쳐났다. 따라서 광주시내의 청년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늘 다양하게 준비되었으며, 그런 이유로 젊은 남성들도 그곳에서 빈번하게 조 여사님과 함께 일할 기회를 얻기도 했다. 그 즈음에 나 역시도 조 여사님의 뜻으로 그곳에 자주 나가서 여러 가지의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했으므로.

어떠든지 내가 보기에는 여사님 같은 훌륭한 여성지도자가 없었다. 문자 그대로 여장부였다. 아무 말씀 없이 앉아있기만 해도 정감이 우러나왔으며, 눈으로는 웃을지라도 온 얼굴에서는 강인함도 함께 배어났다. 어쩌면 그렇게 함부로 다가서기 어렵게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도 정이 많아 평범한 아낙과 같이 보이기도 했다. 특히 옳은 일에 앞장서고 의로운 생각을 가진 젊은이들이라면 누구나 따뜻한 가슴으로 품어주는 그분은 그곳 광주의 모든 어머니 중의 어머니였다. 그런 그분을 아주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내가 어찌 기쁘고 즐겁지 않았겠는가.

정말이지 홍 변호사님과 조 여사님 두 분은 당시의 캄캄한 어둠 속에서는 등불이었다. 그분들은 시종일관 시대의 아픔과 함께 있었으며, 고난 받는 사람들과 함께 있었으며, 희망으로 몸부림치는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 그 험악한 시대에 오로지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요 시를 쓰는 일에 미친 나마저도 개처럼 끌려가서 감옥에 갇히고 재판을 받을 때, 불원천리하고 서울의 재판정에까지 오르내리던 홍 변호사님의 모습과 함께, 나의 석방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눈물의 기도를 그치지 않으신 조 여사님의 성원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여기에서 내가 두 어른의 빛나는 공적인 활동들에 대해서는 일일이 말하지 않았지만 굳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5월 광주의 비극 속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준 그분들의 놀라운 헌신이 아닐는지. 이미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기 힘든 고령의 노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발자국도 머뭇거리지 않고 무도한 총칼 앞에 맨몸으로 나선 그분들의 헌신이 고귀한 젊은 희생들과 함께 있었으므로 오늘의 광주는 더욱 거룩한 역사의 도시가 되었는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던가.

생각하면 너무도 슬픈 일이지만, 젊은 날 한 시절에 내가 섬긴 두 어른은 진작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제는 나의 추억 따위는 훌쩍 뛰어넘어 그분들의 아름다운 이름과 영혼은 그곳 광주의 우뚝한 상징이 되었다. 흰 눈이 쌓이면 더욱 찬란하고 신비로운 무등산 봉우리와 함께 영원한.

/양성우 시인·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