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거의 이십오 년 만에 브레히트의 단편소설 ‘이단자의 외투’를 다시 읽었다. 이 소설은 지동설을 주장했으나, 종교재판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며 빠져 나온 갈릴레이와는 달리, 끝까지 지동설의 신념을 굽히지 않다가 사형을 당한 브루너에 관한 일화이다.

80년대 초반에 이 작품을 읽었을 때, 나는 심정적으로 자신을 지식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종교재판을 받고 죽음을 선택하는 와중에서도 외상빚이 남아 있는 외투를 돌려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브루노의 성실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한편으로, 재봉사의 아내와 같은 무지한 민중들이 그들의 위대한 인물을 몰라보고 한겨울에 그의 외투를 벗겨내는 처사에 울분을 느꼈었다.

이십오 년 동안, 나는 여전히 심정적으로 자신을 지식인의 테두리 안에 두며 살고 있었는데, 이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문득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현재 교수로서 살아가는 내 삶의 양태가 소설 속의 재봉사의 아내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지금 나의 주된 관심사는 논문 쓰기이며 나에 대한 실적 평가이다. 학술진흥재단의 등재지나 등재 후보지가 아닌 학술지에는 논문을 투고하지 않으며, 가능한 한 인센티브가 있는 과목을 선택하여 강의한다. 능력이 있었다면, 영어 강의도 하고, 전공과 관련되거나 관련될 듯한 프로젝트를 따와서 대학원 제자들에게 연구비도 나누어 주고 그에 대한 논문을 써내느라 더욱 바빴을 것이다.

나의 실적은 성과급에 반영되고, 학과 평가에 영향을 준다. 이는 궁극적으로 대학 평가에 반영이 되고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대학의 순위와 정부로부터 받는 대학의 지원금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까 내 교수 생활의 대부분은 자본의 영향력 안에 지배되어 있는 것이다. 다른 누구가 이상을 위해 헌신을 하든 투쟁을 하든 자신의 외상빚만이 문제였던 재봉사의 아내와 무엇이 다른가?

민주화 20년을 넘어서면서, 우리 사회는 아직 민주주의의 이상과 가치를 실현하는 데에 있어서 많은 문제점들을 드러내고 있지만, 정치적인 억압과 굴종을 강요받는 체제에서는 벗어났다. 이제는 지사적인 지식인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아니니, 시대적 사명이나 도덕적 의무감에서 벗어나 지식인들은 홀가분하게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기능적 지식인의 역할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독재 정치에 대한 비판만이 비판인 것처럼 생각해 왔던 지식인들은 우리 사회가 신자유주의로 토대가 변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개인적 업적에 몰두하는 것이 자본이나 국가에 종속되는 과정이었음을 미처 인식할 사이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기능적 지식인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에게 지위와 부를 부여하고 있는 그 지식이 자신이 기반한 사회로부터 지출된 것임에 대한 책임 정도는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지식인이란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사회 공익에 도움이 되는 일반적 지식과 윤리를 가진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정도의 자기 인식도 없으니까, 서울대학교의 총장까지 했던 이가 기꺼이 자신의 학문적 소신을 바꾸며, 환경부의 공무원들은 20년 이상 공들여 온 팔당댐 부근의 유기농 농지를 없애려고 하는 것이다.

지식이 단지 경제에 복무하기를 바라는 신자유적 사고의 거센 흐름과 체제 안에서 한 개인이 이를 거스르기는 힘든 일이다. 그래서 근래에 국가의 지식 체제나 자본으로부터 독립하여 대중과 소통하며 지식을 생산하는 ‘대중지식’ 혹은 ‘다중지성’의 그룹들은 우리 시대의 지식 혹은 지식인의 대안처럼 보인다.

인터넷의 발달로 대중이 지식의 소비자이면서 창조자가 된 시대에 지식인은 더 이상 대중과 유리될 필요가 없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다중지성의 일원으로서 지적 서비스를 제공하고 민주 사회를 향한 정신적, 물적 토대를 대중과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시민 사회에 어떤 지식이 자리잡는가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지 않겠는가.

/이미란 전남대 교수·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