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더운 여름에도 냉방이 잘된 방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많고 원하면 쌀밥에 보양식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찌는 듯한 더위와 꺼칠꺼칠한 풀 때 죽은 참으로 싫었다. 그래서 아침저녁으로 소슬한 바람을 맞고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을 바라보는 것이 참 좋았다. 추수해서 하얀 쌀밥을 배불리 먹는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뿌듯했다. 또 한여름의 모기는 얼마나 극성스러웠던가? 그러던 모기도 찬바람이 불면 주둥이가 구부러져 물지 못한다. 모기로부터 해방되는 기쁨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짐작할 수도 없을 것이다.

예전 같지는 않지만 지금도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좋다. 마주치는 사람들도 더위가 지나고 좋은 시절이 왔다는 듯 서로 덕담을 주고받는다. 언론 매체에서는 어김없이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 왔음을 보도한다.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는 계절’이라는 뜻의 이 성어를 ‘풍요로운 수확의 계절’이자 동시에 독서하기 좋은 계절이라고 바꾸어 생각한다. 그러나 원래 중국에는 이같이 낭만적인 뜻을 내포한 ‘천고마비’는 없고, 유목민족의 침략을 뜻하는 ‘추고마비(秋高馬肥)’만 있었다.

지금 중국은 옛날 유목민족들의 땅까지 모두 아울러 자기들 영토로 삼고 있지만, 예전에는 황하 유역의 중원평원만이 한족의 땅이었고, 이곳이 원래 중국이었다. 그런데 중원은 이를 둘러싸고 있는 유목민족들로부터 끊임없이 침략을 받아왔다. 그래서 최초의 통일왕조인 진나라는 만리장성을 쌓아 흉노의 침공을 방어하려 했으나 곧 멸망했다. 뒤를 이은 한나라는 흉노에게 조공을 바치기도 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공격을 가하기도 했으나 침략을 막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매년 가을이 깊어 흉노의 말들이 살찔 때가 되면(到秋馬肥) 침략이 있기 마련이어서 전전긍긍하였다.

당나라 때는 돌궐·토번·회흘 등의 유목민족들이 끊임없이 침략하여 편할 날이 없었다. 두보(杜甫)의 할아버지 두심언(杜審言)은 돌궐과의 전쟁에 나가 있는 친구 소미도(蘇味道)가 승전하고 돌아오기를 바라며 시를 지었는데, 다음은 그 일부이다.

구름 맑은 하늘에 혜성이 날리고(雲淨妖星落)/가을이 깊어가니 요새의 말들은 살이 찌겠구나 (秋深塞馬肥)/말안장에 기대어 명검을 휘두르고(據鞍雄劒動)/붓을 휘둘러 격문을 날리도다 (搖筆羽書飛)

손자 두보는 ‘유화문(留花門)’이라는 시를 지으면서 할아버지의 시구를 살짝 고쳐 ‘높은 가을 하늘 아래 말들은 살쪄 튼튼하니(高秋馬肥健)’라고 읊었다. 이후 사대부들은 유목민족의 침략을 염려하는 시문을 지을 때 다시 이를 ‘추고마비(秋高馬肥)’로 고쳐 성어처럼 썼다.

송나라 때는 거란족·여진족·몽고족의 침략이 차례로 이어졌다. 특히 남송 때는 회수(淮水)를 경계로 여진족의 금나라와 대치하고 있었는데, 여진족은 가을이 되어 말이 살찌고 활이 팽팽해지면 회수와 양자강을 건너 침략해 왔다. 그래서 사대부들은 ‘가을 하늘이 높아지고 말이 살찌므로’ 상쾌하고 풍요롭다는 뜻으로가 아니라 또 여진족들의 침략이 있겠지 하고 염려하는 뜻을 담아 더욱 절실하게 ‘추고마비’를 읊었다.

이와는 달리 우리나라의 ‘고려사’에는 ‘추고마비’가 보이지 않는다. 고려도 북방 유목민족들의 침공을 받았지만, 중원처럼 매해 가을마다 침략을 당하는 처지는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유목민족의 말들이 살찌는 계절을 염려하는 기사가 일부 보이지만, 중국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조선 초기 100여 년 동안에는 ‘초장마비(草長馬肥)’가 10여 개 보이는데, 이는 풀이 자라 말을 먹일 수 있는 4∼5월에 야인(野人)들의 침략이 있을 것을 염려하는 말이다. 17세기 초 선조 말부터 광해군 시기까지 20여 년 동안에는 ‘추고마비’를 염려하는 논의가 5-6차 보인다. 그때는 만주족이 청을 세우고 명나라뿐만 아니라 조선까지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청나라는 결국 정묘와 병자 양 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굴복시켰지만, 명나라는 그들에게 멸망했다.

아직 한낮의 햇볕은 따갑지만 아침저녁으로 제법 바람이 시원하다. 가을바람을 맞으며 동아시아의 역사를 더듬어본다. 중국은 역사시대 내내 유목민족들의 침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우리나라도 그들의 침략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나 중국에 비하면 빈도는 매우 적었다.

/김택민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