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요즘 인도의 습도는 정말 견딜 수가 없을 정도다. 그래도 더위 속의 깨달음이 있기에, 아니 찾아야 하기에, 견뎌내기로 한다. 이미 15번을 방문한 인도지만 이번 16번째의 여행은 필자 개인에게 더위 밖의 남다른 의미를 던져준다. 물론 이번 인도방문도 일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다. 델리의 아트페어와 심포지엄 행사에 전세계 주요 미술관계자들과 함께 VIP로 초대되어 참관 토론하는 과분한 영예를 누리고 있다.

주최 측이 마련한 4일간의 일정이 끝나고 행사장이라는 ‘궁궐’을 탈출하여 싯다르타가 그토록 보고자 했던 일상이라는 리얼리티로 뛰어들어 본다. 물론 필자 같은 평범한 존재에게 ‘고행’이나 ‘수행, 혹은 ‘깨달음’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다만 ‘미술, 혹은 ‘한국’이라는 궁궐을 떠나 미술 밖, 한국 밖의 리얼리티를 ‘순례’하고자 할 뿐이다.

비둘기에게 매일 모이를 주는 선량하게 생긴 택시기사를 만났다. 그래서 그와 쉽게 친구가 되었고 이제야 비로소 인도에 진 빚과 미안함을 청산하기로 했다. 주최 측에서 주도한 일정을 마쳤기에 그동안 일에 치여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타지마할과 제이 푸르 사원을 찾아가기로 했다. 이번 심포지엄 난상토론의 핵심주제였던 탈 헤겔적, 탈 칸트적 숭고와 아름다움의 가치를 땀과 발로 느끼고자 한 결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필자에겐 여행이 아닌 훈련이자 학습의 걸음걸이다.

새로운 친구가 된 택시기사 라케시 쿠마르가 새벽 다섯 시에 필자를 깨웠다. 물론 오늘도 어김없이 타지마할로 향하는 도로의 한켠에 차를 세우고 비둘기 모이를 꺼내들었다. 자신이 동물에게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사랑이자 예의라 한다, 차 안에서 이 광경을 촬영하고 있는 필자를 끌어내어 함께 모이를 주라고 강권한다. 오늘은 내 손위의 비둘기가 베니스의 산마르코광장의 비둘기보다 더욱 아름답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산마르코의 관광객이 아닌 그저 보잘것없는 순례객의 손위라서 그런지 비둘기는 더욱 자신의 생명의 가치를 뽐내며 퍼덕인다. 불현듯 광주에서 먹던 갓김치(일명 갓지)가 떠오른다. 성숙의 시간을 지내고 숙성단계를 통과하여 내 손위에 놓여졌던 김치 말이다.

‘태양이 지지 않는 제국’건설의 야심 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설립된 곳, 델리에서 200여년 전에도 존재했을 비둘기의 상징적 의미를 갓김치와 오버랩시키고 있는 시간이다. 내겐 단지 평화나 자유의 의미를 벗어나는 깨달음과 번민의 시간이다. 택시기사 라케시는 산마르코의 비둘기는 울고 있는 것이고 여기 비둘기는 ‘노래’하고 있다고 자랑한다.

성숙을 위해 그토록 발버둥쳐 왔다, 동인도 회사를 건설하고 식민지배를 일삼아 세계의 태양을 ‘억지로’지지 않게 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침략과 정복을 정당화하고 포장하며 ‘영국신사’, ‘젠틀맨’를 창안해 냈다. 인도의 원숭이를 닮은 자의 결혼식을 황태자의 ‘세기의 결혼식’이라 하여 전 세계인이 숨죽이며 쳐다본 기억이 난다. 그 세기의 결혼은 처참한 비극으로 끝났고 미국식 ‘듣보잡’(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 오바마의 시대가 왔다. 필자도 스스로를 ‘자발적 듣보잡’으로 규정한다.

성숙을 넘는 숙성의 시간이 있다. 숙성은 인도의 고통과 죽음, 싯다르타의 깨달음을 좇는 ‘죽음’의 시간을 통과한 후에나 비로소 성립되는 시간의 개념이다. 갓김치도 썩는 과정을 통과한 후에 비로소 새롭게 온전한 생명으로 부활하여 제 맛을 낸다. 숙성은 성숙의 시간의 길목에 서서 또 다른 성숙을 잉태하게 하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오늘 목격하고 있는 델리의 걸인들과 현기증 나는 자동차 경적 소음, 쓰레기 더미를 결코 부패와 혼란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단지 짧은 숙성의 과정일 뿐이다.

오늘 이 시간 필자를 태우고 가고 있는 자동차는 과거의 혼란, 이슬람세력의 무굴제국의 왕 샤자하가 세운 타지마할의 시간을 향하고 있다. 오늘의 숙성을 위하여 어제의 고통과 죽음, 성숙의 비극적 결말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비밀의 우물을 길어내는 두레박 속의 시간 말이다.

/이원일 스위스BSI재단 상임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