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국제무대에 뛰어들고 각국을 여행하면서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많이 있다. 전혀 문화권과 풍습이 다른 곳에서 이질적 정치, 문화적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빚어진 촌극들과 실수들이 무수히 많았다. 그런데 그 못 잊을 추억 속에 적응하지 못했던 서구의 음식 문화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가장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필자는 여전히 어쩔 수 없는 ‘촌놈’일지도 모르겠다.

필자가 뉴욕에서 유학생 신분으로 짧지 않은 세월을 궁핍하게 보낸 시절에도 가장 고통스러웠던 부분이 바로 ‘먹을거리’ 문화의 차이였다. 당시 80년대의 뉴욕에는 한국식당이 그리 많지도 않았고, 김치를 파는 곳을 어렵게 찾아내도 비싼 달러화를 감당할 수 없어 눈물을 머금고 값이 상대적으로 쌌던 피자집이나 햄버거가게로 발길을 돌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마도 김치에는 중독성이 있었던 모양이다.

중년이 되어 여행을 많이 해야 하는 현재도 직업의 특성상 전 세계의 주요 허브 공항들을 자주 이용하게 되는데,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나 뮌헨공항, 이탈리아 밀라노의 말펜짜 공항, 파리의 드골공항, 그리고 아시아의 베이징 공항 등이 필자의 단골 착륙지 들이요, 공항입장에서 보면 필자가 단골 손님이 되어 버렸다. 같은 장소를 무수히 반복 착륙하는 상황이 되다 보니 허기를 달래기 위해 들르는 공항식당들도 이제는 필자를 기억하는 반갑게 맞아 주는 곳이 많아졌다.

물론 이렇게 ‘반가운’ 손님으로 자리매김 되기까지에는 필사적이고도 절박한 ‘투쟁’의 역사가 있었다. 바로 김과 김치의 전쟁이 그것이었다. 언젠가부터 인천공항에서 휴대용 포장 김과 포장 김치, 고추장, 멸치 등을 발견하고 부터는 생존을 위한 ‘전투식량’들을 필사적으로 비행기에 실은 후, 도착한 공항의 식당에서 현지 음식을 주문한 후 슬그머니 포장 전투식량들을 꺼내서 식탁 위에 올려놓는 웃지 못할 풍경을 연출하게 된 것이다. 프랑크푸르트의 소시지와 밀라노의 피자, 파리의 바케뜨 위에 김치와 김, 멸치들이 섞여지는 필자만의 ‘삼합’, ‘사합’, ‘오합’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주변 손님들의 따가운 눈총과 웨이터들의 항의(특히 냄새와 관련된)에 맞서 엉덩이를 떼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는 것이 무척 힘들었으나 이젠 너무도 당당히 나의 삼합들을 세계 어느 식당에서도 꺼내 놓게 되었다. 이미 같은 얼굴과 같은 ‘행태’를 여러 번 목격한 현지 웨이터들도 이미 포기 한 것 같아 이제는 당당함을 넘어서 천연덕스러운 ‘삼합’의 강사의 수준에 도달하게 되었다. 물론 묵은 김치와 돼지고기 수육, 홍어를 올려놓는 전라도의 명품 토속음식인 삼합이 아니라 현지음식과 전투식량이 섞인 필자만의 급조된 삼합이지만 말이다.

바야흐로 ‘하이브리드(섞임과 공존)’의 전쟁시대가 도래했다. 하이브리드자동차가 출시되었고 더욱 빈번해진 21세기의 문화교류는 하이브리드의 현상을 더욱 가속화시킬 것으로 전망한다. 세계의 대통령이 된 오바마가 인종 간의 하이브리드 케이스요, 남미의 메조티조(축구선수 호나우두의 외모)가 ‘특수화’를 넘어 ‘일반화’된 하이브리드다.

광주에 가면 꼭 빠지지 않고 ‘감상’하게 되는 삼합을 바라보면서 언젠가부터 이 삼합의 묘미와 숙성미, 배합의 지혜들을 세계화할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이브리드 시대이기에 그 고민과 도전이 더욱 유효해진다. 필자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휴대하고 다녔던 비닐포장전투식량들에게도 이제는 좀 더 당당한 신분과 지위를 부여해 주고 싶다.

전라도의 흑산 홍어와 돼지고기, 김치의 배열과 조합에 의해 명품 음식으로 탄생한 이 삼합의 위력을 세계에 알리고 단지 명품 음식의 반열에 올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 남도 선조들의 ‘가치’와 ‘지혜’를 세계화하고 싶은 새로운 꿈이 생겼다. 전지구적 ‘웰빙’ 시대에 맥도날드의 ‘트리플’ 버거라는 미국식 삼합보다는 우리의 삼합이 더욱 빛나는 조합으로 주목받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다.

〈이원일 스위스 BSI 재단 상임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