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쫓겨난 남자들이 찜질방에 모여 신세 한탄을 한다. 30대는 아내에게 라면 좀 끓여 달라 했다가 쫓겨났고, 40대는 외출하는 아내에게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가 쫓겨났고, 50대는 외출하는 아내에게 같이 가자고 따라나섰다가 쫓겨났단다. 그럼 60대는? …… 가만히 있는데 나가라 하더란다.”

현실에서야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나겠는가마는, 이 시대 아버지들의 위상이 얼마나 추락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블랙 유머다.

권위의 상징이던 아버지들의 뒷모습이 갈수록 초라해지고 있다. 직장에서는 상사 눈치 보랴, 똑똑한 후배들에게 치이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화끈하게 한 잔 하며 풀고 싶지만, 아들 녀석 학원비가 떠오를 때면 술자리는 으레 소박해진다. 지친 가슴 속으로 찬 술을 붓는다. 인생의 쓴맛을 알면 술이 달다더니, 술이 술술 넘어간다. 위축됐던 마음에 비로소 호기가 생겨난다.

집으로 가는 길. 대한민국 아저씨들이 아버지가 되어 보무도 당당히 현관에 들어서지만, 유감스럽게도 가정에서조차 그들이 설 자리는 작아 보인다.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데도 어쩐지 미안한 일만 잔뜩 저지른 기분이다. 월급을 봉투로 받던 시절에는 한 달에 한 번일지언정 세상을 호령하듯 큰소리 떵떵 쳤었는데, 은행 계좌로 입금되고부터는 용돈 한 푼 더 타내기 위해 구차하게 핑곗거리를 짜내는 신세로 전락했다.

세상에는 능력 있는 남편들이 왜 그렇게 많은 건지. 아내의 불만은 점점 많아지고, 아이들은 따로 논다. 아버지가 끼어들면 대화가 끊긴다. 아이들과 친해지려 말을 하면 할수록 아이들과의 거리는 더 멀어지고, 가장의 권위를 세워보려 큰소리를 치면 칠수록 자신이 작아지는 걸 느낀다.

대한민국 남자들. 그들은 가족들과 소통하고 감정 표현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들의 아버지 또한 그랬을 것이다. 아버지의 무심함을 야속해 하면서, 그들 또한 서서히 아버지를 닮아갔을 것이다. 아이들이 울 때 엄마들은 함께 울며 상처를 어루만져 주지만 아버지들은 가슴이 아파도 아프지 않은 척, 슬퍼도 아무렇지 않은 척, 속으로 울어야 했다. 남자다워야 하니까. 랜더스가 그랬던가. 아버지란 울 곳이 없어서 슬픈 사람이라고.

정말, 아버지만큼 가깝고도 먼 존재가 또 있을까. 세상 모든 자식들을 있게 한 사람이지만, 정작 자신의 분신인 자식들에게는 가까이하기 껄끄러운 존재가 바로 그들이다. 돌아가시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하는 존재다. 생전에 내뱉듯이 툭 던진 말씀 한마디가 두고두고 생각나 가슴을 적시게 하는 존재다. 행복할 때는 눈에 보이지 않다가 살기가 팍팍해질수록 생각나는 그런 존재다.

우리의 삶이 신산해졌음인가. 아버지가 다시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모두가 가난했던 70년대, 지금의 아버지들의 아버지 이야기를 다룬 영화 ‘아부지’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IMF 경제 위기를 전후로 김정현 씨의 소설 ‘아버지’와 조창인 씨의 ‘가시고기’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심금을 울렸던 적이 있는데, 10여 년 만에 다시 대중 속으로 아버지가 돌아온 것이다.

우리 시대 아버지들에 대한 애잔한 찬사가 현실 속에서 세상 모든 아버지들을 포근히 달래주기를 기대해본다. 저 무뚝뚝한 아버지의 마음의 속살에 더없이 보드라운 사랑이 있음을 일깨워주기를 소망한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가부장적인 제도 속에서 힘겨워하는 아내들이 많지만, 가부장제 속에서 자라나 개인주의 사회를 살아야 하는 ‘낀 세대’ 가장들의 애환에도 따뜻한 위로를 보내고 싶다. 가장의 행복과 아내의 행복이 제로섬 게임은 아니지 않은가.

더 이상 우리들의 아버지를 이대로 외롭게 두어서는 안 된다. 아버지의 술잔에 담긴 눈물을 보아야 한다. 아버지의 초라한 어깨에 얹힌 삶의 무게를 보아야 한다. 그들의 허풍 속에 담긴 비애를 보아야 한다. 아버지가 존경과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주름진 그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감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버지들도 ‘맹목적인 남자다움’의 굴레를 내려놓고 ‘인간답게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이 세상 모든 아버지들이 가족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으면서 진정으로 행복해지기를 소원한다.

/김필식 동신대학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