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2009년 04월 12일(일) 23:59 가가
여기 하나의 전설이 있다. 20년도 더 된 오래된 전설이다. 늙은 무법자는 정력이 절륜해서 70세가 넘었지만 왕성하게 일을 벌였다. 그는 건물의 설계에서 시공까지 스스로 해야 직성이 풀렸다. 그는 스페인의 천재 건축가 가우디를 존경하는 듯했다. 입만 열면 유럽의 성당들은 몇 백 년에 걸쳐 건축되었노라고 예술사를 강의했다. 위대한 건축물일수록 오래오래 미완성인 채로 거푸집을 둘러쓰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지론인 듯했다. 예술에 대한 그의 이 같은 신념은 드넓은 무등산 자락의 아늑한 서석 벌을 기괴한 예술품들로 채움으로써 시현되어 갔다. 그는 아름답고 아늑한 그곳을 살벌한 폐허로 만들 줄 안 천재적인 예술가였다.
미완성의 예술품들을 위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공사는 시도 때도 없이 벌어졌다. 공사는 개강 무렵이면 유난히 활발해졌다. 200여 명 이상을 수용하는 대형 강의실에서는 주변 공사장에서 울리는 굉음과 어우러져 매우 역동적인(?) 수업이 진행되곤 했다. 청운의 꿈을 안고 빚을 내서 치른 등록금은 온통 먼지투성이가 된 흉물스런 구조물의 철근과 콘크리트로 녹아들어가는 대신 그의 기업들은 늘어만 갔다. 돈 되는 기업도 꽤 있다고 했다.
그의 가장 위대한 예술 작품은 산자락을 까뭉개고 엄청난 양의 철근을 엮고 콘크리트를 부어 세워지고 있던 장엄한 백악의 성채였다. 그 성채의 콘크리트 지붕 두께는 1미터도 넘었으나 비만 오면 강의실마다 복도마다 물바다가 되었다. 교수 연구실은 햇볕도 들지 않는 8층 첨탑 다락방에 있었다. 밤에는 쥐들이 드나들었다. 거푸집으로 둘러싸인 강의실의 유리창은 대부분 어긋나 있거나 깨져 있었다. 3월 과 11월은 추위서 강의가 되질 않았다. 5월과 9월의 오후는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과 더위로 강의를 진행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한 학기 16주 강의는 저절로 10주 안팎으로 단축되었다. 참으로 태평한(?) 시대의 전설이었다.
무법자는 자기가 위대한 인물임을 애써 표현하려 했다. 그는 스스로를 태양에 비유했다. 호를 자애로운 태양이라는 뜻의 ‘자양’이라 짓고, 뒷산을 자양봉이라 명명한 뒤, 그 위에 핵융합발전소를 짓겠다고 호언하기도 했다.
매일 아침 모든 교직원을 운동장에 집합시켜 놓고 그의 위대한 사상을 끝없이 설파하다가 뜀박질을 시켰다. 뜨거운 여름이면 온정을 베풀어 바라크 건물 안에 모아 놓고 몇 시간씩 사상 교육을 시켰다. 이미 그의 종이 되어 버린 불쌍한 영혼들은 한증막 안에서 고맙게 몇 시간씩 사우나 은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철없는(?) 어린 양들은 무법자의 위대한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날이 갈수록 시위는 격화되어 갔다. 1987년 봄 학기가 되자 무법자는 모든 교수들에게 밤에 그의 집과 학교를 지키라고 명했다. 교수들은 할 일 없이 밤늦게까지 서성일 수밖에 없었다. 강의와 연구는 이미 그들의 주 임무가 아니었다.
경찰이 기습하여 백악의 성채가 장엄한 불꽃으로 타오른 뒤에야 무법자는 쫓겨났다. 그 때서야 비로소 무법자의 쇠사슬에서 벗어난 교수와 학생들은 폐허의 잔해를 걷어내고 강의실과 연구실을 정돈하여 교육의 재건에 착수했다. 격변하는 시대에 허송한 40여 성상 가까운 시절을 만회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었겠는가? 그래도 교수와 직원, 학생들이 일치단결 합심해서 경향의 칭송을 들을 만큼 괄목상대의 발전을 이루었다.
호사에는 마가 끼는 법인가? 원래 시빗거리도 못되었던 사안을 이른바 분쟁위원회라는 곳에 올려놓고 도필리(刀筆吏·법관의 별칭)들이 칼끝을 농하여 무법자의 망령을 되살리려고 하고 있다. 망령의 여얼(餘孼·멸망한 사람의 자손)들이 겨우 제자리를 잡은 학문의 전당을 어슬렁거리며 짓밟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한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서푼도 안 되는 알량한 법리를 내세워 1년 3개월을 끌더니, 마침내 다시 그들에게 송두리째 넘겨주려 하고 있다.
무법자에게 짓밟힌 세월의 아픔은 고스란히 지역의 손실이 되었다. 무법자는 학교의 황폐화와 지역의 낙후를 유산으로 남겼었다. 옛날 군사정권은 이를 오히려 방조하는 듯했다. 뇌물을 받고 묵인한다는 말도 나돌았다. 지금 위정자들도 그와 다른 것 같지 않다. 애당초 그들에게 이 지역의 교육 따위는 관심거리도 아니었다. 그들의 시비 기준은 후원자가 누구인가에 따를 뿐이다.
지금 3만 가까운 이 지역 인재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학문의 전당이 존망의 기로에 서 있다. 이 대학의 성패는 지역의 성쇠와 직결되는 문제다. 단결해서 이를 지켜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김택민〈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미완성의 예술품들을 위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공사는 시도 때도 없이 벌어졌다. 공사는 개강 무렵이면 유난히 활발해졌다. 200여 명 이상을 수용하는 대형 강의실에서는 주변 공사장에서 울리는 굉음과 어우러져 매우 역동적인(?) 수업이 진행되곤 했다. 청운의 꿈을 안고 빚을 내서 치른 등록금은 온통 먼지투성이가 된 흉물스런 구조물의 철근과 콘크리트로 녹아들어가는 대신 그의 기업들은 늘어만 갔다. 돈 되는 기업도 꽤 있다고 했다.
그의 가장 위대한 예술 작품은 산자락을 까뭉개고 엄청난 양의 철근을 엮고 콘크리트를 부어 세워지고 있던 장엄한 백악의 성채였다. 그 성채의 콘크리트 지붕 두께는 1미터도 넘었으나 비만 오면 강의실마다 복도마다 물바다가 되었다. 교수 연구실은 햇볕도 들지 않는 8층 첨탑 다락방에 있었다. 밤에는 쥐들이 드나들었다. 거푸집으로 둘러싸인 강의실의 유리창은 대부분 어긋나 있거나 깨져 있었다. 3월 과 11월은 추위서 강의가 되질 않았다. 5월과 9월의 오후는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과 더위로 강의를 진행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한 학기 16주 강의는 저절로 10주 안팎으로 단축되었다. 참으로 태평한(?) 시대의 전설이었다.
무법자는 자기가 위대한 인물임을 애써 표현하려 했다. 그는 스스로를 태양에 비유했다. 호를 자애로운 태양이라는 뜻의 ‘자양’이라 짓고, 뒷산을 자양봉이라 명명한 뒤, 그 위에 핵융합발전소를 짓겠다고 호언하기도 했다.
매일 아침 모든 교직원을 운동장에 집합시켜 놓고 그의 위대한 사상을 끝없이 설파하다가 뜀박질을 시켰다. 뜨거운 여름이면 온정을 베풀어 바라크 건물 안에 모아 놓고 몇 시간씩 사상 교육을 시켰다. 이미 그의 종이 되어 버린 불쌍한 영혼들은 한증막 안에서 고맙게 몇 시간씩 사우나 은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철없는(?) 어린 양들은 무법자의 위대한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날이 갈수록 시위는 격화되어 갔다. 1987년 봄 학기가 되자 무법자는 모든 교수들에게 밤에 그의 집과 학교를 지키라고 명했다. 교수들은 할 일 없이 밤늦게까지 서성일 수밖에 없었다. 강의와 연구는 이미 그들의 주 임무가 아니었다.
경찰이 기습하여 백악의 성채가 장엄한 불꽃으로 타오른 뒤에야 무법자는 쫓겨났다. 그 때서야 비로소 무법자의 쇠사슬에서 벗어난 교수와 학생들은 폐허의 잔해를 걷어내고 강의실과 연구실을 정돈하여 교육의 재건에 착수했다. 격변하는 시대에 허송한 40여 성상 가까운 시절을 만회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었겠는가? 그래도 교수와 직원, 학생들이 일치단결 합심해서 경향의 칭송을 들을 만큼 괄목상대의 발전을 이루었다.
호사에는 마가 끼는 법인가? 원래 시빗거리도 못되었던 사안을 이른바 분쟁위원회라는 곳에 올려놓고 도필리(刀筆吏·법관의 별칭)들이 칼끝을 농하여 무법자의 망령을 되살리려고 하고 있다. 망령의 여얼(餘孼·멸망한 사람의 자손)들이 겨우 제자리를 잡은 학문의 전당을 어슬렁거리며 짓밟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한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서푼도 안 되는 알량한 법리를 내세워 1년 3개월을 끌더니, 마침내 다시 그들에게 송두리째 넘겨주려 하고 있다.
무법자에게 짓밟힌 세월의 아픔은 고스란히 지역의 손실이 되었다. 무법자는 학교의 황폐화와 지역의 낙후를 유산으로 남겼었다. 옛날 군사정권은 이를 오히려 방조하는 듯했다. 뇌물을 받고 묵인한다는 말도 나돌았다. 지금 위정자들도 그와 다른 것 같지 않다. 애당초 그들에게 이 지역의 교육 따위는 관심거리도 아니었다. 그들의 시비 기준은 후원자가 누구인가에 따를 뿐이다.
지금 3만 가까운 이 지역 인재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학문의 전당이 존망의 기로에 서 있다. 이 대학의 성패는 지역의 성쇠와 직결되는 문제다. 단결해서 이를 지켜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김택민〈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